일러스트=이철원

연극 ‘GV빌런 고태경’(원작 정대건, 각색 연출 이은비)의 주인공 조혜나는 영화감독이다. 첫 장편영화가 실패한 이후 오랫동안 영화를 찍지 못하고 있다. 조혜나의 하루는 영화를 위한 시간보다 생계를 위한 시간이 더 많다. 영화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영화에 대한 책을 판다. 조혜나는 분명 영화인이지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시간은 오지 않으며, 과거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인으로서의 조혜나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그러던 어느 날, 조혜나는 우연한 기회로 학교에서 처음 만들었던 영화의 GV(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GV빌런’을 만나게 되고, 온갖 날카로운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왜 편집을 제대로 안 했는지, 왜 180도 법칙을 지키지 않았는지, 왜 배우들의 눈 깜빡임을 잡아주지 않았는지 묻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NG’가 될 장면을 왜 ‘오케이’했느냐는 것이다. ‘왜’의 세례가 쉴 새 없이 계속되지만, 조혜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어쩌면 답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 찍은 영화였고, 처음 꾸려진 배우와 스태프들이었고, 처음으로 내려야 하는 결정이 많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어떤 때는 ‘NG’가 ‘오케이’로 보이고, ‘오케이’가 ‘NG’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혜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 영화는 이미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영화는 당연히 ‘오케이’의 모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묻어두었던 ‘NG’의 시간을 자꾸만 들추는 GV빌런에게, 조혜나는 귀여운 복수를 꿈꾼다. 그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촬영이 거듭되며 조혜나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GV빌런은 사실 영화 조감독 출신이었다. 아직 한 편의 영화도 감독하지 못했지만, 수십년째 자신의 첫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 좋은 장면을 모조리 메모하고, 좋지 않은 장면은 반드시 질문해서 이유를 묻는다. 좋은 장면과 좋지 않은 장면 모두, 언젠가 찍을 자신의 첫 영화를 위한 밑바탕으로 소중히 기록해둔다. GV빌런 또한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한다. 택시를 운전하고, 영사기를 관리하고,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 교실 수업에 나간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영화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한다. 택시에서 만난 손님들을 통해 생생한 캐릭터를 만나고, 영사기를 관리하며 이상적인 화면 비율을 찾아내고,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으로 생전 처음 자신의 영상을 찍는 것을 지도하며 영화에 대한 기쁨을 알리려 노력한다. 그녀의 옛 영화 동료들은 그녀가 정말로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그녀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 일생일대에 찾아온 감독 데뷔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아니, 어쩌면 도망쳤다. 그날 이후 그녀는 두 번 다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동료들이 보기에 GV빌런의 인생은 ‘NG’의 인생이다.

그러나 비웃음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GV빌런은 자신이 백 번이나 고친 시나리오를 묵묵히 품에 안고 있다. 조혜나는 그녀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가끔 상상한다. 어쩌면 GV빌런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올 단 한 번의 ‘오케이’를 위해서, 무수한 ‘NG’의 시간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조혜나가 완성한 다큐멘터리 ‘GV빌런 고태경’을 본 관객들은 점점 상상하게 될 것이다. 한 편의 영화는 ‘오케이’의 모음집이지만, 모든 촬영이 ‘오케이’의 연속은 아니라는 것을. 하나의 ‘오케이’ 컷을 찍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무수한 ‘NG’ 컷을 감당한다는 것을. 하나의 오케이는 무수한 NG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 편의 영화는 오케이의 모음집이 아닌, NG의 모음집이라는 것을. 한 번의 웃음 뒤에 열 번의 울음이 숨어있고, 하나의 완전한 엔딩 뒤에 백 개의 불완전한 엔딩이 숨어있다는 것을. 영화 속 세상이 끝나고, 현실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관객들은 또 한 번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영화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오세혁 극작가·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