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진경·Midjourney

지난 4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하원 650석 가운데 41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한 여론조사에서 ‘왜 노동당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총리로 취임한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를 지지하기 때문이라는 응답은 단 1%에 그쳤다. 대신 보수당을 내쫓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48%에 달했다. 한마디로 노동당에 대한 지지보다는 보수당에 대한 응징 정서가 선거를 좌우했다.

보수당에 대한 반발이 커진 배경에는 2021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생활비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가정에서 에너지를 사용하거나 먹을거리를 사는 생필품 지출이 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인건비가 상승하고,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영국인들은 일상에서 적잖은 고통을 겪고 있다. 최근 3년 사이 영국 가계의 에너지 비용이 연평균 1971파운드(약 350만원)에서 3549파운드(약 630만원)로 80% 급등한 것이 보수당의 참패를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픽=양진경

에너지 관점에서 보면 영국은 운이 좋은 나라다. 석탄 매장량이 풍부해 산업혁명 과정에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시기에는 북해에서 대규모 석유와 가스가 발견된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중반에 EU 차원에서 재생 에너지를 적어도 20%는 사용하라는 의무가 생겼는데,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재생 에너지를 활용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긴 해안선과 얕은 수심, 강한 바람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해상 풍력 발전이 두드러지게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에너지원을 효과적으로 교체하면서 75%에 이르는 높은 에너지 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차적으로 석탄 발전을 폐지하고 천연가스와 풍력으로 전환하는 과정도 순조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2021년부터 영국의 전력 생산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풍력 발전이 전체 전력 공급의 29.4%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충분히 불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천연가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 에너지 가격 상승이 시작됐다. 그 이듬해인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영국의 가계와 기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은 천연가스 저장 시설이 부족한 탓에 사전에 충분한 분량을 비축하기 어렵다.

그래픽=양진경

전기 요금이 단기간 급등함에 따라 에너지 비용을 어떻게 낮출 것인지에 대해 영국의 양대 정당은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놨다. 보수당은 친환경 정책을 당분간 유보해 가계의 비용 부담을 절감시키겠다고 했다. 반면 노동당은 화석 에너지 가격 변동과 무관한 재생 에너지에 기반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연료비가 들지 않으면 비용 상승도 없다는 논리다.

노동당은 이를 위해 2030년까지 육상 풍력은 2배, 태양광은 3배, 해상 풍력은 4배를 늘리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당초 영국 정부가 설정했던 2035년까지의 무(無)탄소 전력 시스템 구축 목표를 5년 앞당겨 2030년까지 달성할 수 있다는 시간표를 짰다. 노동당은 이런 목표를 달성하면 가계당 연평균 300파운드(약 53만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이런 야심 찬 목표 달성에 가장 큰 걸림돌은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전력 생산 수단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영국은 1990년 전력 산업을 민영화했기 때문에 정부 의지대로 전력과 관련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당은 그레이트 브리티시 에너지(GB Energy, 이하 GBE)라는 공기업을 설립하기로 했다. 34년 만에 정부 소유의 전력 기업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영국 정부가 80억 파운드(약 14조원)를 출자해 설립할 예정인 GBE는 전국의 청정 에너지 프로젝트를 소유·관리·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민간 자본이 투자를 꺼리는 수익성이 낮은 프로젝트에 대해 GBE가 사업비를 지원한다는 게 노동당의 구상이다. 이런 방식으로 에너지 산업을 둘러싼 상황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공기업의 장점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GBE를 둘러싸고 효과에 비해 과다한 비용 투입이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게다가 GBE를 제외하고도 노동당이 추진하고 있는 청정에너지 사업이 다양하기 때문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관건이라는 지적도 있다. 노동당이 구상하고 있는 녹색 에너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비용은 모두 237억 파운드(약 42조원)에 달한다. 그중 주택 단열에 투자하는 비용만 향후 5년간 130억 파운드(약 23조원)에 이른다.

이런 대규모 투자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건 당연하다. 올해 영국의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04%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만성적인 재정난이 이어진다는 얘기다. 일단 GBE 설립에 필요한 80억 파운드 가운데 상당 부분은 북해의 가스 및 석유 회사에 대한 추가적인 세금 징수를 통해 확보한다는 것이 노동당의 계획이지만, 실현될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게다가 민간 소유의 국가 전력망이 열악한 상황에 있다는 문제도 영국의 전력난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풍력 발전 사업자가 송전망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길게는 10년씩 대기해야 한다. 전력저장시설(ESS)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전망 운영을 담당하는 기업인 ‘내셔널 그리드’는 향후 5년 동안 300억 파운드의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이 정도로는 수년간의 투자 부족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영국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데 두려움이 없는 나라다.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시도하고 만드는 것에 대해 용감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미래 비전을 선점하는 것에 능숙하다. 하지만 영국이 시작했던 일 가운데 상당수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거나 더 많은 비용만을 유발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우리는 편견을 버리고 향후 5년 동안 노동당의 에너지 정책 실험 결과를 지켜보며 연구하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노동당 정권의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노동당, 원전 건설 계속하기로… 2030년대 중반 SMR 가동 계획

영국이 재생 에너지에만 ‘올인’하는 건 아니다. 원자력 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주요국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SMR(소형 모둘형 원자로)을 국가 차원에서 처음 추진했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2020년 영국 롤스로이스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은 영국 내에 16개의 SMR을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지난해 영국 정부는 SMR을 포함해 원자력 업무를 총괄하는 원자력청(GBN·Great British Nuclear)을 설립하며 의욕을 보였다. 원자력청은 2030년대 중반에는 SMR의 상업운전을 시작할 계획이다. 노동당은 재생 에너지를 강조하면서도 보수당이 집권할 때 마련된 원전 건설 계획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영국이 원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앞으로 전력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난방, 취사, 운송 등을 모두 전기로 충당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전력 수요가 현재에 비해 최대 3배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이런 막대한 전력 수요 증가를 모두 풍력·태양광 등으로 감당하는 것은 열악한 송전 시설 등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2050년까지 전체 전력 수요의 25%를 원전이 담당하도록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영국에서 원전 건설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대형 원자로 건설 비용이 계속 증가하고 있고, 공사 기간도 늘어지고 있다는 게 영국 정부의 고민이다. 영국 정부는 민간참여 및 투자 확대, 다양한 방식의 재원조달 방식 허용을 통한 수익률 제고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신중한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 영국 정부는 우리나라의 한전과도 수차례 협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한전은 현재로선 참여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