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인천 시내 한 자동차용품 시공업체에서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고 있다. 최근 자동차 급발진을 주장하는 교통사고가 늘어나면서 사고를 입증할 수단인 '페달 블랙박스'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뉴스1

1972년 여름, 작은 방에서 선풍기를 틀고 잠을 자던 30대 청년이 사망했다. 다음해에는 낮잠을 자던 고교생을 비롯해서 더 많은 선풍기 사망자가 나왔고, 이후 매년 비슷한 사고가 보도됐다.

의료계와 경찰은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를 틀고 잠을 자면 산소가 부족해지고 체온이 내려가서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의사 중에는 선풍기 사망설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외국 의사 대부분은 선풍기로 인해 저체온증이나 호흡곤란이 생긴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이라고 봤다. 2000년대 들어 선풍기 사망설은 한국에만 있는 ‘괴담’으로 간주되면서 국민의 관심에서 사라진다.

한국에서 자동변속기 차량이 도입되면서 급발진이 보고되었다. 차량에 엔진제어유닛(ECU), 변속기제어유닛(TCU), 전자스로틀제어시스템(ETCS) 같은 전자장비가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급발진은 매년 수십 건까지 증가했다. 자동차 전문가 중에도 엔진을 제어하는 이런 전자장비의 오작동이 급발진을 낳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엔진과 별개로 작동되는 브레이크가 왜 말을 안 듣는지, 급발진 차량에 대한 조사에서 왜 기기 고장이 발견되지 않는지, ECU의 구조적 결함이 왜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대신 자동차 제조사와 정부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의혹만이 제기된다.

미국에서는 2009년 한 경찰관이 몰던 도요타 차량이 급발진해서 일가족이 사망한 뒤 차량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있었고, 매트가 가속 페달에 끼는 문제와 페달이 고착돼 돌아오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전자장치의 오류 가능성도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전자장비 이상으로 급발진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일본도 1980년대 말에 비슷한 조사를 했고, 사실 한국 정부도 1999년에 조사해서 같은 결론을 내렸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 조사 결과를 신뢰하는데,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