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양진경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정끝별(1964-)


여기 모래가 있다. 산기슭에 혹은 여름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탈을 굴러 내리며 비탈의 맨 아랫부분에 쓰러져 쌓인 모래가 있고, 여름 파도에 밀려와 해변에 하얗게 부서져 쌓인 모래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깨끗한 모래는 어릴 적 자그마한 시내 바닥에서 개울의 수면 아래까지 내려온 햇살을 받아 알알이 반짝이던 모래이다. 그 모래의 경쾌하고 해맑고 동그란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어쨌든 모래 알갱이가 있다. 그것을 보고 만지며 시인은 한데 수북이 쌓인 모래 더미만큼이나 많은 질문을 한다. 어쩌면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모래에게 이 많은 질문이 왜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심지어 본뜬 듯 비슷비슷한 모래에게 낱낱의 개별적인 이름을 붙이려고도 한다. 이를 통해 모래는 잘게 부스러진 돌 부스러기로서만 존재하지는 않게 된다. 심지어 시인은 또 묻는다. 이 모래 알갱이가 바로 ‘나’와 ‘너’의 초상(肖像)이 아니냐고.

관심과 애정에서 일어난 질문은 깊은 이해에 닿게 한다. 물음의 문을 무뚝뚝하게 닫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