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혁 논설위원

‘동해’ ‘일본해’ 표기를 둘러싼 한·일 외교전에 최근 의미 있는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 바다 이름의 국제적 표준을 정하는 국제수로기구(IHO)가 이름 대신 ‘고유 번호’로 바다를 식별하는 중재안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IHO는 ‘일본해’ 단독 표기를 유지해 왔는데 91년 만에 변경이 가능해졌다. 당장 ‘동해’가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 명칭이 ‘숫자’로 대체되면 ‘일본해’ 주장의 법적 근거를 허무는 효과가 있다. 11월 IHO 총회에서 이 안건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지난 30여년간 국제 무대에서 ‘동해 단독 표기’가 아니라 ‘동해/일본해 병기(倂記)’를 요구해왔다. 대한민국에서 동해 단독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이를 고집했다면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다. 정부는 국제적 여건을 감안한 절충안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했다. 그와 함께 꾸준히 물밑 여론전을 벌여 전 세계 지도에서 ‘동해’가 쓰인 비율을 40%까지 끌어올렸다. IHO가 ‘병기’와 사실상 비슷한 효과를 내는 숫자 체계로 한·일 분쟁을 봉합하려는 것도 이런 변화된 환경이 계기가 됐다. 이제 ‘일본해 단독 표기’라는 공식 기준도 없어지면 동해 표기는 더 퍼질 것이다. ‘꿈 같은 100을 좇으려 헛심을 쓰는 대신 일단 현실적인 50을 취하고, 나머지 50을 위해 차분하게 후일을 도모…’ 외교의 정석(定石)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만약 동해 외교전에 ‘국내 정치’가 끼어들었을 경우를 상상해본다. 동해 이슈에 국민적 관심이 높았다면 정치권이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처럼 ‘반일(反日) 몰이’에 이용할 유혹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정권 사람들에게 선동은 일도 아니다. 여론조사를 돌리면 당연히 ‘동해 단독’ 지지가 ‘동해/일본해’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나온다. 정치권은 ‘일본의 동해 강탈 야욕’을 규탄하며 “'일본해 병기'를 주장하면 다 토착왜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권 나팔수들이 “애국가를 ‘동해/일본해물과 백두산이~’로 바꾸란 말이냐” “동해를 타협하면 다음엔 독도 뺏긴다”고 국민 감정을 자극해주면 얼추 여론몰이 완성이다. 이런 성화에 떠밀려 국제 무대에서 우리 입장이 흔들렸다면 결과는 뻔하다. 다행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해가 여론 관심 밖에 있던 게 축복이라고나 할까.

물론 동해와 위안부·강제징용 이슈를 일률적으로 비교할 순 없다. 위안부·강제징용에는 직접적 피해자가 존재하고 법원 판결도 있어 제약이 많다. 그렇지만 냉철하게 외교로 풀어야 할 문제에 ‘정치’를 앞세우다 일을 그르쳤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정권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를 풀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노력해온 전문가들 고언을 무시하고 죽창가부터 불렀다. 그렇게 해서 ‘조국 사태’ 등에서 여론 눈을 돌리고 선거에서 재미도 봤다. 위안부 이슈로 잇속을 챙긴 윤미향이 국회의원이 됐고 일본 맥주·의류 판매량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한·일 외교가 망가지고 일본 내 친한파들마저 등을 돌리면서 피해자들이 한(恨)을 풀 기회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지금 일본의 간판이 스가 총리로 바뀌었고 연내 한·일 정상회담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동안 노골적으로 한국민을 자극하던 아베 전 총리는 한·일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스가에겐 ‘아베 그림자’ 꼬리표도 따라다니지만, 어쨌든 정상이 바뀐 것은 국가 간 관계 재설정의 흔치 않은 기회다. 이 정권이 ‘동해’ 같은 타협의 묘를 발휘할지, 고질적인 반일 몰이를 밀어붙일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