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은 한국 기업의 역할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역대 다른 회담과 차별성이 있다.
이날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은 우리 기업이 양국 관계에서 갖는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삼성전자·현대자동차·SK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394억달러(약 44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이 발표됐다. 미국이 희망하는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인공지능(AI) 등 첨단 분야가 모두 망라돼 있었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악몽’에 시달리는 바이든 미 대통령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얼마나 기뻤는지 기자회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을 일어서게 했다. 그가 “생큐, 생큐, 생큐”라며 우리 기업인들을 위해 힘차게 박수를 친 장면은 이번 회담의 하이라이트였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문 대통령의 희망대로 햄버거 대신 다른 음식이 나왔다. 청와대는 회담 전에 스가 일본 총리 방미 때 나온 햄버거 식사는 곤란하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 선호 메뉴를 알려줬는데 메릴랜드 크랩 케이크가 제공됐다. 청와대는 “미국 측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문 대통령의 식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여기엔 스가 총리와는 달리 특별 대접을 받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문 대통령도 귀국하면서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 “정말 대접받는다는 느낌이었다”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국제 정세를 잘 아는 한 외국인 전문가는 이번 회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스가 총리 방미 당시 일본 측은 아무런 투자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어떤 투자도 약속한 것이 없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은 한국 기업이 44조원짜리 투자 계획을 밝힌 덕분에 크랩 케이크 오찬을 할 수 있었다.” 2017년 대선 당시 민주당 경선 주자를 도왔던 K씨는 “삼성, LG, SK가 없었으면 생색도 못 내고 깃털처럼 가벼움만 더할 뻔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외교 역량으로는 이미 국제정치의 변방으로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관찰대로 정상회담에 맞춘 대규모 투자 계획이 없었다면 크랩 케이크가 나오는 오찬 회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바이든 대통령과 대면 회담하는 기회를 못 가졌을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임기 내내 반(反)기업적 경제 정책을 펼쳐 기업을 숨 막히게 해 왔다. 조사 대상 기업의 92%가 현 정권이 ‘기업 친화적이 아니다’라고 답변한 여론조사도 발표된 바 있다. ‘사회주의 시각으로 경제를 바라본다’는 답변도 67%였다. 이런 문 대통령이 정작 기업 활동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자기 입맛대로 식사하고 온 문 대통령은 이제 차가운 바다에서 숨진 세월호 학생들에게만 고마워하지 마시라. 44조원짜리 오찬을 하도록 도와준 한국의 기업에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고, 늦었지만 정책 기조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문 대통령이 이렇게 비싼 식사를 하고 와서도 바뀌지 않는다면 내년 대선을 앞둔 유권자만이라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누구 때문에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레임덕 대통령이 이렇게 환대받고 왔는지 말이다. 기업의 역동적 활동으로 중세 시대 100년보다 1년의 변화가 더 빠른 시대에 어떤 리더가 필요한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과소평가돼 온 기업과 기업인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것도 대한민국의 활로(活路)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