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하는 작가 중에 K가 있다. 작품이 먼저였지만, 그를 좋아한 이유는 인터뷰 때문이었다. 8년 전, 역대 최연소인 32세로 이상문학상을 받았을 때다. ‘최연소’라는 수식에 느꼈을 자부와 부담을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가장 젊은 작품은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작품 아니냐고. 100년 전 150년 전 고전을 읽다 보면, 이 소설을 쓴 선배는 얼마나 젊으면 100살이나 젊은 나랑 말이 통할까 신기했다고. 그런 의미에서 계속 젊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K의 최근 인터뷰를 한 문학 잡지에서 발견했다. 작품도 발언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는데, 드물었던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고백했다. 연속해서 문학상을 받으며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을 그 무렵, 한 좌담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의 자취방 월세를 처음 밝혔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살던 방에도 미달하는 허름한 방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었다. 왜 나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새삼 꺼냈는가. 그런 궁핍을 말하지 않는 게 약간은 자부이기도 했는데. 그리고 자답한다. “주변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갑자기 안정적인 환경이 주어졌고, 그 사실에 당황했거나 난처한 내가 나도 모르게 약자성(弱者性)을 드러내고 싶어했구나. 내가 약자성을 탐냈구나…. 그 후로 나는 혜택받은 작가이니 불평하거나 엄살 부리지 말자, 그런 단속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불평과 엄살 혹은 저항은 약자 최후의 방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라고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회적 소수나 평범한 소시민까지는 그런 방패의 활용을 공감할 때가 있다. 얼마 전 TV 드라마를 보며 웃었던 장면이 있다. 연기 못한다고 구박받는 무명 여배우가 주정을 부리자 비슷하게 취한 술집 여주인이 ‘배틀’을 신청했다. “나도 망한 걸로는 안 밀리는 여잔데, 누가 더 불쌍한가 우리 한번 붙어볼까.”

하지만 약자가 아닌 사회적 강자, 혹은 권력을 잡은 정치 지도자가 이런 주장을 펼치면 반대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많은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현 정권에서 비슷한 ‘내로남불’이 반복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무의식이건 그렇지 않건, ‘약자성’과 ‘피해자성’을 탐내기 때문이라고. 무려 172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을 확보한 집권당인데도 여전히 주류와 기득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독재 타도’를 외치던 80년대 학생 운동 시절 이래로 우리는 약자이며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만, 따라서 약자이자 피해자인 우리는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될 권리를 가진다는 환상 말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젊은 세대의 웃지 못할 SNS 놀이 중에 ‘가난 인증’이란 게 있다. ‘약자 배틀’처럼, 누가 더 가난한지를 겨룬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강북 아파트에서 거주하니 가난하다고 주장하고, 강남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우스 푸어라 불행하다고 슬퍼한다. 이런 소용돌이에서 정작 말문이 막히는 이들은 진짜 가난한 사람들, 정말로 힘든 사람들이다. 박완서의 소설 제목 ‘도둑맞은 가난’처럼, 마지막 방패마저 빼앗긴 셈이다.

거의 모두가 가난을 경험한 시대, 절대다수가 권력의 피해자였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이제 대한민국은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뛰어넘어 추월의 세계관이 필요한 나라. ‘서민 코스프레’하는 대선 후보들이나 여야의 정치인들은 제발 가난을, 약자성을 탐내지 마라. ‘최후의 방패’가 필요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