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에 큰 문학상 받고 뒤늦게 이름을 알린 소설가 C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예술 장르라면 사실상 끝난 거 아니냐고. 과격한 발언이지만, 자신의 장르까지 포함한 자학(自虐)이니 좀 더 이어가보자. 그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골프채 영업 사원을 한 적이 있다. 자부도 체념도 아닌 어투로 C가 말했다. 영업이나 예술이나. 둘 다 자기 만족이 궁극적 목표 아닌가. 예술적 명성이건, 돈이건 간에. 그런데 왜 예술가에게만?

정부의 예술가 지원과 관련, 올해의 뉴스로 꼽힐 두 논란을 기억한다. 우선 소설가 이기호의 대한민국 예술원 비판.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은 아무리 신청해도 열에 하나 스물에 하나 될까 말까인데, 대부분 대학교수로 은퇴한 예술원 원로들은 종신 수당까지 받는 게 공정하냐는 문제 제기였다. 또 하나는 대통령 아들인 설치미술가와 관련된 소음이다. 다들 아는 이야기를 또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테고, 기자의 시선을 붙든 대목은 그가 페이스북에 쓴 이 대목이다. 미술 작가들은 지원금을 경연 대회처럼 여긴다는 것. 자신이 하는 미술은 실험 예술이라 잘 팔리지 않기 때문에, 실력 있는 작가라면 이 ‘경연 대회’에 나가 인정받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소설을 읽으며 윤리를 배울 수 없다는 깨달음이 소설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한 소설가 이기호가 대한민국 예술원을 비판하고 나섰다./이명원기자

두 논란 모두 국가의 예술가 지원은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당연한가. 젊은 예술가냐 원로 예술가냐, 한정된 예산의 우선순위 문제일 뿐인가. ‘잘 팔리지 않는 예술’을 국가가 지원하면 정말 그 예술은 융성해지고, 그래서 궁극적 목적인 시민의 문화 향유는 풍성해졌나.

문재인 대통령 아들 문준용씨가 지난해 전시에서 자신의 그림자 작품을 시연하고 있다. 정부 유관단체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연합뉴스

안타깝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는 ‘No’라고 말하고 있다. 서울 민예총의 손이상 운영위원을 통해 알게된 프랑스와 브라질의 최신 사례를 인용한다. 문화정책 분야의 프랑스 정부 브레인 격인 예술사회학자 피에르 미셸 멍제르(68) 교수가 확인한 슬픈 역설. 국가가 예술을 지원하면 할수록 예술가는 더 가난해지더라는 것이다. 80년대 사회당 정부가 예술창작 지원을 대폭 늘렸더니 예술가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90년에 비해 2009년에는 무려 두 배.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술가가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해서, 예술에 대한 사회의 수요까지 두 배로 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어떨까. 예총과 민예총이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회원 수만 100만명을 훌쩍 넘는다. 문예창작학과 있는 대학은 전국에 30개, 미술대학은 무려 100개를 넘는다. 하지만 우리는 역시 알고 있다. 요즘 예술대학 졸업생 상당수의 현실적 직업은, 예술대학 입시생 과외라는 것을. 예술가의 공급 초과는 필연적으로 예술가들의 경제적 빈곤으로 이어진다.

2000년대 브라질 룰라 정부 시절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지우베르트 지우는 문화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사람으로 꼽힌다. 소위 ‘쿨트라 비바’(Cultura Viva). 창작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 중심으로의 재편이다. 특정 장르와 예술가 위주로 지원했더니 지원 범위 바깥의 예술과 예술가에게는 상대적 불이익이 돌아갔고, 소비와 향유 역시 극소수 계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더라는 반성이었다. 지우는 브라질 시민들에게 브라질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해 큰 호응을 얻었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청년들에게 문화 티켓을 발급하면서 이 전환에 동참했다.

내일 세상이 망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예술가들을 존경한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사고, 음악을 들으며, 공연장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 지원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둬야 할지는 다른 문제. 균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