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들 사이에 ‘신문지 고발’이란 말이 있다. 언론·정치권이 제기한 문제를 대충 짜깁기해 고발하는 걸 빗댄 말이다. 이런 고발은 대선·총선 때 더 횡행한다.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이란 단체는 최근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대권 도전을 위해 월성 원전 조기 폐쇄와 관련해 보복 수사를 했다는 것이다. 현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위해 월성 원전의 경제성 평가를 조작했다는 증거가 이미 나왔는데도 이런 고발을 했다. 이 단체가 윤 전 총장을 고발한 것만 수십 건에 달한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도 쿠팡 물류센터 화재 사고 당시 ‘먹방 유튜브’를 촬영한 일로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됐다. 실제 문제가 있는 것도 있겠지만 이런 고발은 대부분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진다.
정치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도 아니다. 지난해 검찰이 접수한 고소·고발이 49만4488건(인원 기준으로는 74만3290명)인데, 이 중 무혐의 등으로 불기소처분 된 건수가 64%에 달한다. 범죄 혐의가 가벼워 기소하지 않는 기소유예나 기소중지된 건수를 빼도 불기소율은 48%에 달한다. 그만큼 고소·고발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중 상당수가 빌려준 돈 못 받았다고 사기죄로 고소하는 경우다. 정말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당사자 간에 풀어야 할 금전 문제를 빨리 처리하려고 고소·고발부터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고소·고발 공화국’이란 말이 나왔지만 이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고소·고발이 접수되면 피고소인이나 피고발인은 바로 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검찰의 경우 대검 예규에 따라 자동 입건돼 사건번호가 부여되고 피의자가 된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사건 처리의 형평성을 기하기 위한 측면이 있겠지만 이런 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다.
피의자는 범죄 혐의가 있어 정식 입건된 사람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피의자라고 하면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검찰은 간혹 민감한 사건에선 고소·고발된 사람을 대외적으로 “피고소인, 피고발인 신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무적으론 이미 피의자로 다 분류돼 있다. 말만 그렇게 할 뿐이다.
부르는 말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피의자가 돼도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다”고 대충 뭉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피의자가 되면 강제처분 대상이 될 수 있다. 수사기관의 출석 요구에 정당한 이유 없이 불응하면 체포영장을 통해 체포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금전 문제로 고소를 당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꽤 오래 집을 비워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가 체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헌법상 무죄추정원칙에 반(反)하는 측면도 있다. 또 수사 경과도 알기 어려워 검찰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기소 가능성으로 불안에 떨어야 하고, 기업인들은 혹여 출국 금지라도 당하면 기업 활동에 문제가 생길까 봐 불안할 수 있다.
고소·고발 남발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그 처리 방식이라도 바꿔야 한다. 우리와 같은 고소·고발 제도를 갖고 있는 프랑스는 2000년 무죄추정원칙 강화를 위해 피고소인에 대해 피의자와 참고인의 중간적 지위를 갖는 ‘변호인 조력을 받는 참고인’ 제도를 신설했다. 고소·고발됐다고 강제처분 대상이 되지 않게 한 것이다. 다만 수사 결과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면 그때부터 피의자 지위를 부여하고 강제처분 대상이 되게 했다. 우리도 이런 ‘중간지대’를 두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