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을 신청하라는 문자가 왔다. 경기도에 살고는 있으나 신경 끄고 있었다. 무차별적 현금 살포에 수혜자로 참여하기 싫었다. 그러나 두어 차례 독촉 문자를 받고 보니 욕심과 호기심이 생겼다. 10월 25일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인터넷으로 재난기본소득 25만원을 신청했다. 처음엔 통장 잔고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서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러다 동네 편의점에서 마스크, 콜라, 휴대폰 부속품 등을 사고 카드를 냈더니 바로 문자가 왔다. 방금 편의점 구매로 1만3500원이 기본소득에서 차감됐으며 잔액은 23만6500원이라고 찍혀 있었다. 그 뒤 동네에서 냉면을 사먹어도, 자동차에 휘발유를 주유해도, 기본소득에서 차감됐다. 은행 잔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25만원은 둘이서 칼국수나 만둣국처럼 가볍게 외식을 하면 10번쯤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금액이 재난소득에서 빠져나갈 때마다 문자를 받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비겁한 심정 변화가 생겼다. 모든 경기도민을 마취시키는 무차별적 포퓰리즘에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은 슬며시 사라지고, 대신 ‘공짜 돈’이 주는 달콤한 기분이 생기면서 재밌기까지 했다. 거저 얻는 ‘돈 맛’이 이런 건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결국 내가 냈던 세금이 나한테 되돌아오고 있다는, 제 살 뜯어먹고 있는 중이라는,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은 약해졌다. 경기도에서 서울 광화문 도심까지 광역버스로 출퇴근하면서 운전 기사가 크게 틀어놓는 라디오 방송도 이젠 참을 만했다. 신문 지면, 종편TV 시사 프로, 그리고 유튜브 방송을 통해 3각 파도로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비판하던 나도 물색없이 타락하고 있었다. 건강 재정, 건강 가계를 외쳤던 내 입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현금 지출보다 감정 지출이 더 두렵다. 돈이 들더라도 감정을 다치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저임금 노동자보다 감정 노동자의 일터가 더 불행한 환경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둘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몇 푼 공짜 돈에 젖다 보면 그걸 설계한 사람에게 호감이 느껴지고, 퇴근길 행복이 보장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국민적 각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찬성하는 비율은 22%에 불과하다. ‘추가 지급 자체를 반대한다’는 목소리도 47.7%나 됐다. 취약 계층만 선별 지급하라는 주장은 29.6%다. 국민 열에 여덟은 무차별 공짜 돈 살포에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을 역으로 파고들며 밑바닥부터 흔들어대는 쪽은 여당과 대선 후보들이다. 적자 국채 발행이 두 해 연속 100조가 넘든 말든 그들은 올해 내야 할 세금을 내년 봄까지 유예해주면서 또다시 현금 살포 헬기를 띄우고 있다. 여당 후보는 문 정부 퇴진 이전에 돈을 풀겠다는 것이고, 야당 후보는 집권하면 100일 이내에 풀겠다는 것이다. 여당은 무차별, 야당은 피해자 맞춤형 지원을 내세우고 있으나 재원 마련을 위해 ‘초과 세수’와 ‘국채 발행’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같다.
지난 4·15 총선 때 우리는 ‘현금 살포’의 위력과 ‘코로나 사태’가 여당에 주는 프리미엄을 절절하게 경험했다. 이후 “선거 공약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들렸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는 온갖 독직 혐의로 권좌에서 물러나곤 했으나 그때마다 현금 살포 공약을 내세워 총리를 무려 3차례나 역임했다. 그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지금 한국의 집권당과 대선 후보도 그럴 수 있다. 여야 후보들은 정해진 숫자의 유권자라고 하는 ‘제한된 상권’에서 어떻게든 시장점유율을 높이려고 목숨 건 전쟁을 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