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의 공세가 50일째 이어진 14일(현지시간) 제2 도시 하르키우(하리코프)의 우크라이나군 신병교육대에서 갓 입소한 사람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AFP 연합뉴스

청와대가 유튜브에 최근 공개한 ‘문재인 정부 5년의 기록,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의 1부 ‘오직 평화입니다’를 봤다. 서두에 나온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고 천명했다. 그런데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실패,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탄도미사일 발사 등 이어진 내용은 오히려 ‘평화를 이루려면 이 정권처럼 해선 안 된다’는 타산지석으로 삼기에 적당했다.

평화 지상주의자들 눈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전쟁도 어리석은 짓으로 보이나 보다. 그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는데도 이를 무모하게 추진한 젤렌스키가 자국민을 전쟁에 내몰았다고 비판한다. 러시아와 서방의 완충국인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평화’라는 잣대로만 재면 그렇게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만이 절대 가치라면 20세기 초 국력이 일본의 일개 번(藩) 수준이었던 조선 군주 고종이 총 한 방 안 쏘고 나라를 들어 바친 것도 평화를 위한 선택이 된다. 군사력이 러시아의 20분의 1에 불과한 우크라이나도 대들지 말고 납작 엎드렸어야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30여 년 전까지 한 나라였다. 그땐 옛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과 서유럽 사이에 놓인 완충 국가였다. 1968년 체코 공산당 서기장 둡체크는 다당제 도입, 언론·경제 자유화 등 ‘프라하의 봄’을 추진했다. 소련은 20만 대군과 탱크 수백 대를 동원해 가혹하게 진압했다. 화염병 들고 탱크에 맞선 국민 6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체코는 서방에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차갑게 외면당했다. 소련과 무력 분쟁이 우려된다는 게 이유였다. 소련은 둡체크를 모스크바로 압송했다.

한 나라를 지도에서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국민 전체의 꿈을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 모두의 꿈이었다. 둡체크는 그 꿈의 실현을 위임받았다. 소련은 탱크로 프라하를 짓밟았지만 꿈까지 짓밟지는 못했다. 체코는 1989년 벨벳혁명으로 그들의 염원을 이뤘다. 21년 전 흘린 피를 그렇게 보상받았다. ‘우크라이나의 봄’을 꿈꾸는 이들도 우크라이나 국민이다. 젤렌스키가 그들을 전선에 내몬 게 아니라 유럽행에 국가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 국민이 러시아에 맞서는 길을 택한 것이다.

체코가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한 벨벳혁명을 시작하며 내건 모토가 ‘유럽으로의 복귀’였다. 혁명을 주도한 시민 포럼은 그 이유를 행동 강령에 열거했다. 법치·자유선거·사회정의·깨끗한 환경·인민교육·번영이 그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련이 줄 수 없는 가치들이었다. 서유럽만이 그걸 줄 수 있었다.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 국민도 그렇게 믿었다. 그들에게 ‘유럽’은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열망하는 삶을 담은 어휘였다. 러시아인들조차 서유럽을 방문할 때는 “서쪽에 간다”고 하지 않고 “유럽에 간다”고 했다.

벨벳혁명 이듬해인 1990년 5월, 혁명 성공을 자축하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가 열렸다. 40여 년 망명에서 돌아온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은 흥분과 감격에 상기된 얼굴로 체코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스메타나 교향곡 ‘나의 조국’을 지휘했다. 지켜보던 하벨 대통령과 관객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평화를 위해 전쟁만은 안 된다는 주장은 굴종을 거부하고 참된 자유와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독이다. 우크라이나 국가(國歌)에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구절이 있다. 언젠가 우크라이나가 온전히 해방을 맞고 수도 키이우의 독립광장에서 축하 음악회가 열리는 걸 보고 싶다. 그들이 목 놓아 부르는 국가를 듣고 싶다. 70년 전 세계의 도움을 받아 자유를 지키고 그들이 흘린 피 덕분에 번영을 누리는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