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골 때리는 그녀들' 방송화면

손흥민의 열혈 팬인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오랫동안 부모를 조른 끝에 며칠 전부터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남학생과 어울려 축구공을 차게 됐다. 동급생 중 여자론 유일하다고 한다. 행여 다치면 어쩌나, 걱정도 하지만 축구를 통해 협동심과 희생정신을 기르고 몸이 건강해질 것이란 기대감이 더 크다.

마침 걸 그룹, 개그맨, 가수, 배우, 모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자 연예인들이 팀을 이뤄 축구(정확하게는 풋살) 경기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요즘 인기 절정이다. 이에 앞서 각 종목 은퇴 스포츠 스타들이 팀을 만들어 일반 동호인 팀들과 축구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는데, 처음엔 그 바람을 탄 아류 예능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첫 회, 출연자들이 공도 제대로 못 건드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나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봤는데 정반대였다. 회(回)를 거듭할수록 출연자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플레이 하나하나에 눈을 번득이고, 죽기 살기로 공을 쫓아다니는 기세가 선수들 뺨쳤다. 하이힐 대신 축구화, 화려한 의상 대신 유니폼, 짙은 화장 대신 땀 범벅인 그들은 이미지 관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멍투성이 다리로 공을 찼다. 경기에 패한 뒤 ‘자기 때문에 졌다’며 펑펑 눈물을 쏟아붓는 모습을 보노라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잘 꾸며진 한 편의 예능이라기보다는 스포츠 문외한들이 열혈 동호인으로 변모하는, 성장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들은 실제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촬영 시간 외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별도 맹훈련을 펼쳤다고 한다. 이런 진정성이 마음을 흔들었는지 최근 축구 교실에 여성 지원자가 크게 늘어나고, 다른 구기 종목에도 직접 참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매번 출연자의 진솔한 인터뷰를 접하게 되는데, 최근 “이렇게 진한 동료애를 느껴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는 한 출연자의 평범한 한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다. 축구나 야구, 농구처럼 여럿이 함께 땀 흘리는 팀 스포츠는 개인 종목과는 또 다른 성취감을 안겨준다. ‘자기가 아무리 잘해도 팀이 질 수 있고, 자기가 못해도 희생을 통해 승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천금 같은 교훈을 체득할 수 있다. 야구(희생번트)와 축구·농구(어시스트) 등에서 자리 잡은 희생과 협력이란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면서 승리에 겸손하고 패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절로 쌓인다. 일본이나 북미·유럽 선진국들이 초·중·고 학생들에게 팀 스포츠를 장려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체육은 이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체력장마저 사라진 대학입시제도의 영향 때문인지 체육 시간이 자율학습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외국 대학들이 신입생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스포츠 클럽 활동 같은 것은 아예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운동부마저 예산을 이유로 없애버리려는 학교들도 점점 늘어난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여자들이 스포츠를 체험할 기회는 더욱 제한적이다. 초등학교부터 체육 수업이 남자 위주로 이뤄지면서 성적인 불평등과 열등감, 피해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에서 보듯 아예 팀 스포츠를 체험해보지도 않고 먼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사회, 심지어는 부모로부터 은근히 강요받는, ‘여자다움’이라는 성(性)적 고정관념 역시 좀처럼 깨뜨리기 어려운 장벽이다. 그러니 그동안 팀 스포츠를 통해 진한 동료애를 느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