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공한증(恐韓症)이란 말이 있었다. 유독 한국 축구에 맥을 못 추던 중국이 짜증 반, 시샘 반으로 쓰던 표현이다. 한중 간의 첫 국가대표 A매치는 1978년이었고 이후 32년간 한국과 27차례 붙어 11무 16패를 기록했다. 중국의 첫 승리는 2010년 동아시안컵에서 나왔다.
그 시절 중국은 축구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한국에 공한증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수백 년간 조공을 바치던 후진 농업국이었고, 20세기 절반은 식민 수탈과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올림픽까지 유치하자 충격과 동시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박정희의 산업화 공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박태준을 수입하라”고도 했다.
그런 기조가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를 거치며 대략 30년 이어졌다. 한중 간 물적, 인적 교류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때 베이징의 현대차 공장, 광둥성의 LG전자 공장은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일자리였다. 이 30년이 5000년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 중국에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던 유일한 시기였을 것이다.
2010년 무렵은 그런 분위기의 절정이었다. 그해 3월 싱하이밍(邢海明) 당시 주한 중국공사참사관은 조선일보에 ‘중국의 발전은 한국에 기회다’란 제목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모든 문장이 ‘~니다’로 끝나는 1200여 자 분량의 완벽한 경어체 원고였다. 그는 “우리는 양국 관계를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했다.
한중 관계는 그 무렵부터 삐걱거렸다. 중국은 북한의 천안함 도발을 감싸고 돌았다. 연평도 포격 때도 마찬가지였다. 후계 수업 중이던 김정은이 주도한 도발이었다. 김정일에게 담대성을 인정받은 김정은은 그해 9월 후계자로 공식 등장했다.
당시 중국의 차기 지도자는 시진핑 부주석이었다. 시진핑은 6·25 참전 노병들을 만나 “위대한 항미 원조 전쟁(6·25의 중국식 표현)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했다. 국제 상식과 동떨어졌을 뿐 아니라 한국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망언이다. 하지만 중국의 속마음이었다. 휘황한 교역 성과에 들떠 애써 외면하던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시진핑은 중국몽을 외치며 중국을 마오 시대로 되돌렸다. 집단 지도 체제가 무너지고 개혁·개방은 퇴조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저물고 전랑(戰狼) 외교가 본격화했다. 베이징에선 왕이 외교부장, 서울에선 싱하이밍 대사의 언행이 나날이 거칠어졌다. 미국과 서방은 견제 노선으로 돌아섰지만 한국은 머뭇댔다. 자칫 최대 시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북한 비핵화와 통일에 협조를 얻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래서 미국 눈총을 받아가며 톈안먼 망루에 올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지켜봤을 것이다. 시진핑의 화답은 무자비한 사드 보복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방중 기간 10끼 중 8끼를 혼밥했다. 치욕을 당하고도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했다. 사정은 달랐지만 두 대통령 모두 중국에 대한 미망을 버리지 못했다. 외교관들 사이에 공중증(恐中症)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지난달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는 시진핑의 종신 집권 자축 잔치였다. 더 노골적으로 반(反)민주와 반(反)시장으로 퇴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엊그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은 안 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그런 중국에 대한 경고처럼 들렸다. 하지만 불과 보름 전 한국은 자유민주 진영 50국이 유엔에서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에 함께할 때 혼자 발을 뺐다. 공중증이 고질병이 됐다는 뜻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로 고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