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의 역사는 인권과 절차를 중시하며 발전해왔다. 미국 대법원이 흑인과 백인 강제 분리가 합법이라는 원칙을 깨고 ‘흑백의 생활 터전을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 1954년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묵비권 등을 미리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대법원이 연쇄 성폭행범 어니스트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한 ‘미란다 판결’이 나왔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 시도를 불법으로 금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차규근 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왼쪽),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관련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나와 발언을 하고 있다. 2023.2.15/뉴스1

적법 절차를 강조한 이 판결은 당시 큰 논란을 불렀다. 앞으로 수사가 어려워지고 흉악범들이 처벌받지 않고 풀려날 것이란 비난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우였다는 걸 역사는 입증했다. 실제 미란다부터 풀려나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 후 검찰은 목격자 진술 등을 증거로 미란다를 다시 기소했고,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을 복역했다. 성폭행범이 역설적으로 위대한 판결을 이끌어내 적법 절차를 지키면서도 사법 정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사법에서 적법 절차를 중시하는 것은 흉악범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력한 국가권력에 정의라는 명목으로 위법 수단까지 허용하면 언제든 절차를 무시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인권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치주의 핵심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적법 절차라고 하는 것이다. 체포나 구속 같은 강제 처분은 반드시 법관의 영장을 받도록 하고(영장주의), 악인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도 위법한 절차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것(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 점에서 얼마 전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에 관여한 이들에게 1심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은 역사적 퇴행이다. 성 접대 등의 혐의를 받던 김 전 차관은 출국하려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긴급 출금됐다. 그런데 1심 법원은 긴급 출금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김씨에 대한 재수사가 임박한 상황이어서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돼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했다. 목적이 정당하면 어느 정도의 절차적 위법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김 전 차관 경우는 무고한 일반인의 출국을 저지한 것과 달리 봐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단죄하는 과정에 적법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법의 대원칙과 배치되는 판결이다. 사법의 시계를 미란다 판결이 나온 1966년 이전으로 되돌려버린 것이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진 판사가 한 사람뿐이냐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초반인 2018년 ‘김명수 사법부’가 구성한 조사위원회는 전임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한다며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를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로 개봉했다. 영장 없이 판사 사무실 서랍을 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검찰도 검사 비위를 감찰하다 컴퓨터 등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면 수사로 전환해 영장을 받는데 판사들이 그런 절차를 무시한 것이다. 선의로 해석하면 그들도 ‘정당한 목적’을 위해선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대부분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이젠 정당한 목적이라고 우길 명분도 사라졌다.

당시 조사위원회 주축 판사들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이라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이 연구회 회장 출신이고, 이 연구회 출신들이 김명수 사법부에서 요직을 독차지했다. ‘불법 출금 무죄’ 판결을 한 판사가 이 연구회 출신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절차를 깃털처럼 여기는 김명수 사법부 주류들의 인식이 그 판사에게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판결을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