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후루사토(고향)’라는 일본인 A씨를 만난 적 있다. 1932년 용산에서 태어난 그는 “친구들과 놀던 동네 골목이 그립다”고 했다. 눈시울이 촉촉이 젖었다. 한·일 강제 병합 100년 되던 해인 지난 2010년 취재 과정에서 만난 A씨는 “1945년 8월 종전 후 부모님과 함께 살던 2층 집과 세간을 그냥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10대 초반까지 살던 ‘정든’ 용산을 떠나 ‘낯선’ 일본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하느라 꽤 고생했다고 한다. A씨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피해자라고 느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식민지 수도에서 태어난 그가 어릴 때 살던 곳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침략국 국민으로 태어난 원죄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건 구체적 개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은 아닐까. 혹시 이렇게 생각하면 친일파인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구성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굴욕 외교, 매국 외교 등의 이유로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2023.5.18/뉴스1

1945년 8월 당시 A씨 가족처럼 식민지 조선에 터를 잡고 살았던 일본인은 71만명에 이른다. 살던 집과 재산을 처분하지 못하고 쫓기듯 귀국선을 탔다. 미군정은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이들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일을 가장 시급한 임무로 삼았다. 광복 직후 일본인이 놓고 간 재산은 약 52억4600만달러로 당시 한국 총재산 가치의 80~85%에 이른다는 연구(이대근 ‘귀속재산 연구’)가 있다. 이 중 민간 기업 및 개인 재산이 81%를 차지했다. 평생 살려고 했던 ‘고향’에 땀 흘려 일군 재산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떠나야 했던 일본인 개인에겐 피눈물 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빼앗은 업보이니 통쾌한 일이라고 여기는 건 반(反)휴머니즘의 태도는 아닐까. 혹시 이렇게 생각하면 친일파인가.

국제법은 패전국 국민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서 체결한 ‘국제육전조규’는 제46조에서 ‘점령군은 적지(敵地)의 사유재산에는 절대 손댈 수 없다’고 규정했다. 일본은 당초 미군정이 한국 내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몰수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일본에서 전쟁 배상을 받지 않았으므로 미군정에 귀속된 일본인 재산은 전쟁 배상금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8월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덕분에 미군정이 몰수한 일본인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는 행운을 얻었다. 재산을 영구히 빼앗긴 일본인 개인으로선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1965년 한일협정 과정을 돌아보면 당시 한국 정부가 얻은 결과는 외교적 승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51년부터 14년 4개월간 1500회 만난 회담 과정에서 일본 측은 미군정이 몰수한 일본인 사유재산을 한국 정부가 무상으로 인수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일본은 이 재산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이런 ‘청구권’ 주장을 물리치고 5억달러를 더 받아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35년 식민 지배의 고통을 푼돈에 팔았다는 폄훼는 역사의 구체성을 망각하고 추상적 이념에 함몰된 때문은 아닌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면 친일파인가.

진짜 친일파는 따로 있다. 일광(日光)이란 말은 일본 것이라고 여기는 일부 사람들이다. 일광 즉 햇빛은 인류가 공동으로 향유하는 자연물이다. 이 말을 일본만 사용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런 말 쓰면 안 된다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야말로 일본에 햇빛을 헌납하는 진짜 친일파 아닌가. 12년 만에 재개된 한일 정상 셔틀 외교에 대해 “굴욕” “매국” 운운하는 일부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시대를 아직도 일제강점기로 여기는 진짜 친일파는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