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문학상’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됐다. 올해 5회째인데 과문(寡聞)한 탓에 이제야 알았다. 내달 시상식이 열린다. 주최 측은 “이용악의 작품은 일제강점기 공간에서 수탈당한 가난한 민중의 삶을 토속적인 바탕 위에 정밀한 언어의 감각으로 탄탄한 서사를 형성하면서 밀고 나갔다”면서 “표랑하는 이용악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은 분단 시대의 잃어버린 한국 시사의 부절(符節)을 온전하게 맞추어보려는 한 걸음의 노력”이라고 밝혔다.
주최 측 평가가 크게 틀리지 않다. 이용악(1914~1971)은 일본 유학 다녀와 스물세 살 때인 1937년 첫 시집을 내면서 토속적인 우리말로 시어(詩語)를 벼리는 천재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또래 서정주(1915~2000)·오장환(1918~1951)과 함께 ‘삼재(三才)’로 평가됐다. 시인 김지하가 암송했던 ‘그리움’ ‘오랑캐꽃’ ‘전라도 가시내’ 같은 시는 80여 년 지난 지금 읽어도 찡한 울림을 준다.
주최 측은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용악이 1950년 이후 쓴 시는 ‘토속적인 바탕’이나 ‘정밀한 언어의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북에서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을 지낸 이용악은 6·25전쟁과 김일성을 칭송·찬양하는 시를 숱하게 썼다. ‘별조차 눈감은 캄캄한 밤에도/ 울던 울음 그치고 타박타박 따라서던/ 어린것들 가슴속 별빛보다 그리웠을/ 김일성 장군!//(중략)//흰 종이에 새빨간 잉크로/ 어린 여학생은 정성을 다하여/ 같은 글자를 또박또박 온종일 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평양으로 평양으로’·1951년)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알지 못하기에 섣불리 재단할 수 없다. 하지만 월북 시인이 모두 그처럼 노골적인 찬양시를 쓰지는 않았다. 해방 이전엔 명성이 더 높았던 시인 백석(1912~1996)은 북에서 ‘원수님’을 칭송하는 동시를 쓰기도 했으나 이후 농장 노동자로 살며 40여 년간 절필했다. 박태원·이태준·안회남은 북 정권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임화·김남천·이원조는 1950년대 숙청당했다. 반면 이용악은 김사량·박팔양·이기영 등과 함께 북 정권에 적극 가담했다(정진석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이용악 문학상은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공 자산인 세금 쓰지 않고 문학 애호가들이 스스로 한 시인을 기리는 일을 막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편향성은 반드시 짚어야 한다. 이용악이 북에서 쓴 시까지 망라해 2018년 나온 ‘이용악 시전집’은 엮은이의 말에서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정권을 이은 군 출신 대통령 노태우” “이승만 반공독재의 연속이었던 박정희 철권통치하의 엄혹한 세월”을 적시하면서 “월북 이후 작품을 통틀어 ‘이용악 시전집’을 이제야 내놓는다는 건 그러므로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라고 했다. 6·25전쟁을 일으킨 전범이자 세계 최악의 세습 독재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용악이 북에서 활동한 행적을 관용하고 해방 이전 시 세계를 따로 떼내 높이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폭넓은 관용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문화예술인에겐 왜 적용하지 않나. 이용악보다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하는 데 훨씬 더 기여한 서정주에 대해선 한때 행적을 집요하게 문제 삼아 ‘미당 문학상’을 끝내 없애버렸다. 지난달 별세한 단색화 거장 박서보는 사재를 내 ‘박서보 예술상’을 만들었지만 일부 단체가 “유신 정권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해 결국 1회 만에 폐지됐다. 우리 사회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왜곡과 편향이 심각한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