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5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발리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2.11.16/뉴스1

2000년 새해 벽두에 한국 사회를 강타한 사건은 ‘7인의 탈북자 북송’이었다. 탈북자 7명이 1999년 11월 중국·러시아 국경에서 러시아 측에 체포됐다가 중국을 거쳐 70일 만에 북한에 강제 송환됐다.

유엔이 난민 지위를 인정했음에도 중·러가 핑퐁 게임 하듯이 탈북자를 북송, 큰 충격을 줬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사건이 확대되자 외교부 장관을 경질했다. DJ는 새 외교장관에게 “북한에 송환된 탈북자 7명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지시했다. 신임 외교부 장관이 첫 기자 간담회에서 “외교적 노력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잘못됐다. 외교부를 대표해서 마음 아프고 국민에게 죄송스럽다”고 사과한 게 잊히지 않는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 중국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절망스럽다.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폐막식 다음 날 중국은 군사작전 하듯이 탈북자를 동시다발적으로 북송했다. 지린성, 랴오닝성에 수감돼 있던 탈북자 600명을 트럭에 태워 사지(死地)로 보냈다. 탈북자가 6명, 60명도 아니고 600명이 다시 지옥으로 갔는데도 한국 사회는 무덤덤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누군가 책임을 지거나 질책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2000년 7인의 탈북자 사건 때처럼 사과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도 전혀 언급이 없다. 중국의 탈북자 집단 송환이 알려진 후, 4일 만에 통일부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중국 측에 엄중하게 문제 제기했다”고 밝힌 것이 사실상 전부다.

정부 안팎에서는 윤 정부가 “시진핑 방한을 성사시키려고 탈북자 문제에서 중국에 저자세를 보이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윤 정부는 올가을 들어서 갑자기 시진핑 방한 가능성을 띄우기 시작했다.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9월 “시 주석이 지난해 발리 G20 회의에서 윤 대통령에게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면 기꺼이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같은 달 시진핑이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국무총리를 만나 “방한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했다는 정부의 발표도 나왔다.

시진핑은 2014년 이후 9년째 한국을 방문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한국에서는 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이 각각 세 차례, 두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1992년 양국 수교 후 이런 불균형은 없었다. 그의 방한은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을 계기로 악화된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중국이 이 같은 한국의 희망을 잘 알고, 시진핑 방한을 외교 무기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 방한 가능성을 슬쩍 흘리면서 중국에 할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다. 시진핑이 지난주 샌프란시스코 APEC 회의에서 미·일 정상과 만나면서도 굳이 윤 대통령을 만나지 않은 것은 ‘몸값 높이기’ 전술로 봐야 한다.

중국 사정에 밝은 이들은 시진핑이 당장 방한할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는다. 정부는 리창 총리가 참석하는 한·중·일 3국 정상회의라도 먼저 개최하려고 올해 내내 공을 들였으나 중국은 여전히 뭉그적거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2025년 20년 만에 다시 APEC을 개최하는데, 시진핑이 이때서야 방한을 검토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시진핑의 ‘방한 검토’ 한마디에 정신이 팔려 저자세로 나가다가는 중국의 기만 전술에 당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중국을 중시하며 취임한 지 반년 만에 서둘러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로 치켜세운 그에게 돌아온 것은 ‘베이징 혼밥’과 중국 외교부장이 아랫사람 대하듯 팔을 툭툭 치는 하대(下待)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