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중순 밴 플리트 중장이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개월쯤 됐을 때다. 전선은 이미 교착 상태였다.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어느 쪽도 완승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얼마 뒤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고지전(高地戰)이 치열해졌다. 국군·유엔군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고전했다.
백선엽 1군단장의 SOS에 밴 플리트는 ‘무제한 포격’을 허가했다. 포병의 탄약 사용량을 규정치의 5배로 늘렸다. 정확히 관측한 목표에만 포격한다는 포병 원칙론에 구애받지 않았다. 미 의회가 세금 낭비라며 발끈했다. 밴 플리트가 그 눈치를 봤다면 휴전선은 지금보다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종군기자들 사이에서 ‘밴 플리트 탄약량’이란 말이 나왔다.
AI와 드론전의 시대에 밴 플리트식 포격전이 한창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러시아군은 “3일이면 키이우 함락”을 공언했다. 기갑 전력을 앞세운 기동전이 우크라이나의 결사 항전에 막히자 빠르게 태세 전환했다. 이후 전쟁은 동남부 1200㎞ 전선에 교착됐다. 장기 소모전에선 포병이 왕이다. 6·25 이후 최대의 포병전이 21세기 유럽에서 벌어지게 된 경위다. 전문가들은 이 전쟁을 ‘탄(彈)의 전쟁’이라 부른다.
우크라이나 야포는 350문, 하루에 2000~3000발을 쏜다. 매달 6만~7만5000발이 필요하다. 전량을 나토에 의존한다. 미국의 월간 생산 능력은 3만 발, 나토 전체가 ‘영끌’해도 나머지를 못 채운다. 탈냉전 후 이런 상황이 닥칠 줄 몰랐다. 서방을 통틀어 전시 탄약 수백만 발을 쟁여 놓고 연간 수십만 발을 찍어내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작년 미국은 한국의 155㎜ 포탄 수십만 발을 대여·구입했다. 이것으로 자국 무기고를 채우고 재고탄을 우크라이나에 보냈다. 살상용 무기 수출에 부담이 큰 한국 사정을 감안했다. 한국의 탄약 우회 지원 이슈는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러시아군 야포는 4000문, 하루 1만 발을 소모한다. 모든 군수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해도 한 달 생산량은 25만발 안팎이다. 기댈 곳은 야포 8800문, 방사포 5500문을 운용하는 북한밖에 없다. 작년 9월 북러 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이다. 전쟁 중인 나라의 정상이 ‘전시 내각’을 통째로 수도에서 수천㎞ 떨어진 극동으로 옮겨 김정은을 환대했다. 북이 러시아로 보낸 컨테이너는 6700개가 넘는다. 152㎜ 포탄 기준 300만 발, 방사포탄 기준 50만 발이 실렸다.
작년 초 부촌이라는 개성에서 아사자가 쏟아졌다. 고강도 제재와 3년 코로나 봉쇄의 여파였다. 흉흉한 민심을 다독이려 김여정이 급파됐다. 러·우 전쟁은 천우신조였다. 포탄을 받은 러시아는 식량과 물자로 답례했다. 이걸 실어 나른 컨네이너가 9000개 이상 식별됐다. 두 차례 실패한 북 정찰위성이 3차에 성공한 것도 러시아의 기술 지원 덕이다. 최근엔 대북 제재 위반을 15년간 감시해온 안보리 전문가 패널의 활동을 종료시켰다. 북한의 해결사가 따로 없다. “우리나라의 최우선 순위는 로씨야와의 관계”라는 김정은 말은 진심일 것이다.
70여 년 전 밴 플리트의 ‘무제한 포격’이 한창일 때 쾌재를 부른 건 일본이었다. 2차 대전 패망국에서 미군 병참 기지로 신분을 세탁했다. 파산 위기의 군수 기업들은 대거 기사회생했다. 요시다 총리가 “이제 일본은 살았다”며 안도했다는 루머도 있다. 지금 김정은이 그런 심정일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한 비핵화를 더욱 요원하게 만드는 국제 왕따들의 결탁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분명한 건 7000㎞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우리 안보와 직결돼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책임 있는 정치인 입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우리가 왜 끼냐”는 말이 나와선 곤란하다. 무책임한 선동이기에 앞서 무식한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