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69)의 마지막 영화가 지난 16일 개봉했다. 제목은 ‘어쌔신: 드론전쟁’. 상영관을 찾을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VOD 출시였다. 극장에서는 이미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주연 배우가 투병 중에 촬영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 액션이라니 궁금했다. 차라리 보지 말걸 그랬다. 브루스 윌리스 최악의 영화 후보로 꼽혀도 수긍할 것이다.
이 할리우드 스타의 출연작은 모두 91편(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최근 개봉작들에 손님이 얼마나 들었는지 들추다 아득해졌다. 10명, 8명, 1명.... 영화관에 거는 시늉만 하고 VOD 시장으로 직행했다는 뜻이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근년에는 2021년 개봉해 5463명이 본 ‘코스믹 씬’이 최다 관객이었다. 브루스 윌리스는 2019년 ‘글래스’를 끝으로 흥행 파워를 잃은 지 오래다.
그는 ‘다이 하드(Die Hard)’ 시리즈의 존 매클레인으로 기억된다. 악당들을 물리치느라 ‘죽도록 고생하는’, 그 와중에도 쿨하게 농담을 던지는 뉴욕 경찰 말이다. 브루스 윌리스의 등장은 새로운 액션 영웅의 탄생과 같았다. ‘람보’ 실베스타 스탤론,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달리 이 배우는 초인적인 근육질 히어로가 아니었다. 일상 속 상처투성이 영웅을 인간적으로 그려내 큰 사랑을 받았다.
1988년 ‘다이 하드’에서 존 매클레인은 커다란 곰인형을 들고 LA공항에 도착한다. 별거 중인 아내의 직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가는데, 하필 그 빌딩을 테러리스트들이 장악해 버린다. 매클레인은 살벌한 전쟁터에서 아내와 인질들을 구출해야 한다. “존 웨인 영화를 보고 자란 카우보이”라는 조롱을 듣지만, 깨지고 터지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적들을 소탕한다.
브루스 윌리스는 액션 영화에 머물지 않고 ‘펄프 픽션’ ‘아마겟돈’ ‘언브레이커블’ 등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심리학자를 연기한 스릴러 ‘식스 센스’에서는 액션 없이 연기력만으로 호평받았다. 그러나 인생무상이다. 2016년부터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배우는 2022년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했는데, 작년 초엔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의 중증 치매 판정을 받았다.
말년에 그는 하지 말았어야 할 졸작을 너무 많이 남겼다. “브루스 윌리스는 왜 촬영장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대사를 줄이고 인이어(in-ear)로 불러줘야 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그가 출연하지 않는다면 제작이 무산될 영화들이었을 것이다. 일을 계속하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물을 창조하기는커녕 떠먹여줘야 한다면 배우로서는 사망 선고다. 떠밀리거나 이용당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등장 못지않게 퇴장이 중요하다. 배우 최불암은 2014년 이후 출연작이 없다. 이유를 묻자 “내 연기에 대해 아무도 지적하지 않아 괴리감을 느꼈다. 촬영장에서 불편한 존재가 되면 안 된다”며 “은퇴가 아니라 물러남”이라고 설명했다. 가수 나훈아도 “마이크를 내려놓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을 따르겠다”며 올해 전국 콘서트를 끝으로 은퇴를 시사했다.
브루스 윌리스의 마지막 영화는 진부하고 지루하고 조악했다. 얼렁뚱땅 촬영했다가 창고에 오래 쌓여 묵은 냄새가 났다. 관객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면 추억이 망가지진 않았을 텐데. 이것이 우리 시대 액션 영웅의 마침표라니, 슬프다. 그의 은퇴작을 보며 ‘저렇게 퇴장해도 되는가?’ 묻게 된다. 물러날 기회를 숱하게 흘려보내고 말았다. 굿바이 브루스 윌리스, 굿바이 존 매클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