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은 무능하고 가난했다. 조선 멸망의 첫 번째 문을 연 사건이라는 임오군란도 군인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린 게 화근이었다. 망해가는 나라를 정치 지도자들은 걱정했다. 군란이 터지기 두 달 전, 고종과 대관들이 텅 빈 국고를 걱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고종이 “군사들에게 급료를 여러 달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걱정하자 의정부 고관들이 “계책은 오직 절약하는 것뿐”이라며 근검절약을 대책으로 내놨다. 절약은 개인에겐 훌륭한 삶의 태도이겠으나 그것만으로 국가가 번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종과 신하들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에겐 목숨 걸고 추진해야 할 조선의 미래, 즉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은 저서 ‘한국 사람 만들기’에 이 일화를 소개하며 ‘조선의 지도층이 농본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성리학적 왕도정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같은 위기를 겪어도 비전이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한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엔 ‘사무라이 칼에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며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꿈꾼 사쓰마 번(藩) 지도자들의 비전이 있었다. 임오군란 20년 전인 1862년, 사쓰마와 영국 해군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사쓰마는 영국 해군의 함포 사격에 불바다가 됐고 패전으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사쓰마의 리더들은 위기를 내핍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영국의 막강한 힘을 목격한 그들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영국처럼 부강한 나라’라는 비전이 생겼다. 자기를 굴복시킨 이들의 군함을 사고 “유학생을 보낼 테니 가르쳐 달라”고도 했다.
비전은 정치인으로 하여금 사소한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위대함을 품게 한다. 몇 해 뒤 메이지유신에 성공하며 국가 권력을 손에 넣은 사쓰마의 리더들은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유신 동지들에게도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했다. 사무라이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칼 휴대를 금지했고 경제적 기반이었던 영지까지 내놓게 했다.
우리에게도 큰 비전을 품은 지도자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된 나라에서 떵떵거릴 줄 알았던 지주들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의 농지개혁 덕에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6·25 때 대한민국 편에 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비전을 내놨다. 그러나 국민 손에 선물을 쥐여 주지는 않았다. 인기만 구하려 했다면 그랬겠지만 그가 원한 것은 인기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훗날 자식들 잘살게 하자”며 피와 땀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 땅의 정치인들은 선물 못 줘 안달 난 산타가 됐다. 여든 야든 퍼주지 못해 안달이다. 국민 손에 25만원씩 쥐여주자 하고, 남는 쌀을 무조건 수매해 주자고도 한다. 선심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지만 미래를 위한 비전으로 삼을 수는 없다. 양곡법만 해도 쌀을 무조건 사주는 것은 농민을 돕는 게 아니라 농업 구조조정을 훼방하고 차세대 농업을 준비해 온 이들의 의욕을 꺾을 우려가 크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에 국가적 사활을 걸고 있다. 매사 느려 터졌다는 일본조차 TSMC 구마모토 공장을 착공 2년도 안 돼 완공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반도체 공장 지으려면 토지 보상부터 인허가까지 해결하는 데만 몇 해가 걸린다.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AI 시대에 송전선 하나 놓기가 힘겹다. 정치인들이 나서서 해결에 앞장서야 하지만 감히 국민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한다. 우리가 정말 이래도 되는가. 훗날 우리 자손들이 잠깐 잘살다가 별 볼일 없어진 이 나라 역사를 배우며 지금을 비전 실종 시대였다고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