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의원석이 비어있는 가운데 최민희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취임 100일을 맞은 기자회견에서 부동산 급등 대책을 발표하며 “더 강력한 대책이 주머니 속에 많이 있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처음부터 야당이나 전문가와 충분히 토론해서 최선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 후 문 정권은 30번 가까운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결국 집값 잡기에 실패했다. 주머니 속 대책이란 것도 앞서 내놓은 것 땜질하는 수준이었다. 자기 진영 생각에 갇힌 채로 정책을 마구 ‘지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야당과 전문가 목소리를 입법에 반영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정권을 내놓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알려진 대로 부동산 대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반대 목소리에 귀 닫은 일방독주였다. “집 가진 자를 세금으로 괴롭히자”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수요 억제 일변도로 가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 제안에는 귀를 닫았다. 그러면서 다수를 앞세워 폭주했다.

민주당은 그때나 지금이나 입법 폭주를 비판받을 때마다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신성한 원칙인 양 내세운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진실을 말한다.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공저한 책 ‘연방주의자’에서 “입법권 남용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당면한 가장 위험한 질병”이라는 말로 다수의 입법 폭주를 경고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법안 제출 후 적어도 1년이 지난 후에 가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 동안 반대하는 목소리도 듣고 독소 조항이라든가 부작용도 찾아내자는 취지였다.

프랑스 정치 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던 것도 민주주의에 내재한 다수결의 결함이었다. “다수의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인 반면, 그것이 올바르게 행사된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다수에 대응하는 소수의 자세도 조언했다. “다수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말은 노예의 언어”라고 했다. 다수의 견해를 무조건 따르는 것은 소수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놓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책은 어떻게 입안되어야 하는가. 답은 민주주의 태동기 때 이미 있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은 그리스 북부의 스타게이라다. 그곳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묻힌 곳을 ‘아리스토텔레이온’이라 명명하고 민주주의의 전당으로 삼았다. 무언가 결정할 때면 그곳에 모였는데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에 이를 때까지 대화를 계속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 철학의 요체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시민 집단이 토론으로 오류를 걸러내는 과정으로 봤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도 최근 펴낸 저서 ‘숙론’에서 같은 주장을 했다. 숙론(熟論)은 누가 옳은가를 다투는 디베이트(debate)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며,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남을 이기는 언쟁이 아니라 최선의 답을 찾는 숙의(熟議) 문화라고 했다.

민주당이 전체 18개 상임위 중 11개를 독식하더니 그렇게 독식한 상임위 중 하나인 과방위에서 18일 방송 3법을 단독 처리했다. 법안을 심사할 소위원회 구성 절차는 건너뛰었다. 반대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했다. 양곡법도 다시 추진한다. 원안대로 도입하면 농업의 재정 의존도를 심화하고 미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합리적 지적은 외면했다. 이런 일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게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다수당, 일하는 다수당의 자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개딸의 박수만으로 충분하다면 모를까, ‘폭주하는 다수당’으로 국민의 신뢰는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