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왼쪽)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문제를 두고 여야가 앞다퉈 특검을 추진하는 등 논란을 빚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정부 초기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청와대 예산 문제를 보고하는 독대 자리였다. 문 전 대통령이 부인 김정숙 여사와 관련해 뜻밖 지침을 내렸다. “집사람이 조만간 당신을 부를 겁니다. 청와대 살림과 각종 활동에 예산이 필요하다고요. 그 부탁 절대로 그냥 들어주면 안 됩니다. 나한테 반드시 보고하세요.”

얼마 뒤 문 전 대통령 말대로 김 여사가 총무비서관을 찾았다. 각종 활동에 예산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지침대로 “어렵다”고 했다. 그 후에도 수차례 비슷한 요청이 있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김 여사는 무척 서운해했다고 한다. 청와대에선 ‘고지식하고 꽉 막힌 인물’이란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그를 신임했다. 그는 오랜 측근이나 캠프 출신이 아닌 기획재정부 실무 공무원이었다. 문 전 대통령이나 김 여사, 핵심 측근들과 일면식도 없었다. 그게 발탁 이유였다. 대통령 부인에게 원칙대로 ‘노(No)’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도처에서 압박과 비판이 들어왔지만 그는 상당 기간 지침을 지키려 했다.

에너지 넘치고 활동적인 김 여사는 일찌감치 책을 내고 북 콘서트를 열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문 전 대통령으로선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김 여사와 의견 차가 있어 부부 싸움을 하는 등 갈등이 드러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17년 대선 때는 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 김 여사 일정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수시로 ‘노’라 했다. 후보 가족 문제로 생기는 잡음은 막을 수 있었지만 두 사람 간 갈등이 생겼다. 대선 승리 후 양 전 원장은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했다.

문 전 대통령은 자기 가족을 감찰할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존재가 싫었을 것이다. 이미 양 전 원장은 밀려났고 총무비서관 역할도 느슨해졌다. 대통령 부인에 제동을 걸던 ‘노맨(No Man)’이 한발 물러나자 각종 의혹이 터지기 시작했다. 김 여사의 의상비 논란이 확산되고 인도 방문은 버킷 리스트 의혹으로 비화했다. 경호처는 김 여사 수영 강습으로 구설에 올랐다. 청와대 직원들은 대통령 딸과 수상한 금전 거래를 했다. 대통령 사위의 취업 청탁 의혹은 검찰 수사로 번졌다. 제동 장치가 풀린 결과였다.

윤석열 정부엔 문 정부 초기의 ‘노 맨’과 같은 인적 통제 장치가 아예 없었다. 김건희 여사 문제는 사실상 성역이나 금기어로 취급됐다. 김 여사 관련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 대통령실은 “근거 없는 정치 공작”이라고 했다. 명품 가방 논란에도 윤 대통령은 “매정하게 끊어내지 못한 게 잘못”이라며 “부부 싸움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여사와 통화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았다고 자랑하고, 줄 대려고 접근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제어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게 보낸 김 여사의 개인 문자가 공개돼 정치적 논란을 빚는데도 수수방관했다.

‘김 여사 사과’와 ‘국민 눈높이’를 얘기하면 질책받거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입바른 소리 하는 참모는 회의에서 배제되거나 자리에서 밀려났다. 악역을 자청하는 측근이나 원칙을 고수하는 고지식한 실무진은 애초에 존재하기 어려웠다. 대선 공약이었던 가족 감시 특별감찰관도 2년 넘게 공석이다.

지금 민주당은 윤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몰고 가려고 각종 특검과 청문회를 밀어붙이고 있다. 김 여사 의혹이 그 핵심에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나 참모진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김 여사 문제를 해결할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지금 누군가는 ‘노’라고 외쳐야 한다. 경고등을 켜고 제동을 걸지 않으면 결국 사고가 터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