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제천고속도로 대소분기점에 설치된 분홍색과 초록색 '노면 색깔 유도선'. 차로 변경하느라 우물쭈물하는 시간이 줄어 정체 해소에 도움이 되고 교통사고도 줄여준다. /한국도로공사

차량 내비게이션은 2018년부터 “분홍색 차선을 따라 주행하세요”라고 알려준다. 길눈이 어두운 운전자에게는 복음과 같다. ‘노면 색깔 유도선’이 없던 시절에는 방향을 잃고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복잡한 고속도로 분기점에서 짧은 구간에 차로를 변경하다가 교통사고도 일어난다. 더러 목숨까지 잃는다.

2011년 3월 안산분기점에서 방향을 다투다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도로공사 윤석덕 차장은 그날 “초등학생(초보자)도 쉽게 길을 찾도록 대책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표지판과 점멸등을 추가하는 진부한 방식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사망 사고가 일어났으니 도로 시설물을 미비하게 설치한 내 잘못 아닐까, 하는 우울한 기분으로 귀가한 그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도로에 색칠을 하면 되잖아!

하지만 당시 도로에는 흰색, 노란색, 청색, 적색 등 4가지만 칠할 수 있었다. 길을 안내하겠다고 다른 색상을 사용하는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 분홍색(우회전)과 초록색(좌회전) 유도선을 그리자는 윤 차장의 제안은 동료들과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불법이고 위험한 발상이다” “그로 인한 사고와 피해는 당신이 책임질 거야?” “너무 앞서 가지 마라, 나라면 안 한다”....

자포자기할 무렵 마지막으로 문의한 경찰관이 “좋은 아이디어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뭣인들 못 하겠냐”면서 조력자로 나섰다. 경찰청 승인을 얻어 그해 5월 안산분기점에 최초의 색깔 유도선을 그렸다. 도색 롤러로 수작업을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교통 체증이 발생했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본분을 다하고도 욕을 먹었다.

이런 진통 끝에 탄생한 노면 색깔 유도선은 국민을 더 편하고 안전한 세상으로 이끌었다. 전국 고속도로 분기점과 나들목, 도심 교차로에도 설치되면서 사고 위험을 크게 줄였다. 말 그대로 ‘도로 위의 혁명’. 하지만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둔 공기업 직원은 색깔 유도선이 불법이라 오랫동안 노심초사했다. 도로교통법은 2021년에야 개정됐다. 이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혁신이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한다.

색깔 유도선은 “누가 고안했는지 국회의원 100명보다 낫다”는 호평을 받는다. 윤 차장을 인터뷰한 기사에 댓글이 1500개 붙었다. 불편을 해소해야 할 국회는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질타와 냉소, 불신…. 정치인들이 “국민 뜻에 따르겠다” “국민과 함께 싸우겠다”고 외칠 때 그 ‘국민’은 대체 누구인가? 이 군집 명사의 모호성과 익명성을 끌어와 당파적 욕망의 민낯을 가리는 철판으로 삼는 것인가?

윤석덕 차장은 지난 5월 국민훈장을 받았다. 길치들을 구원하고 교통사고를 줄인 공로. 그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색깔 유도선은 더 늦어지거나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누구는 윤석덕을 작은 영웅으로 부른다. 조난당한 배에서 선장이 마지막으로 떠나야 하는 것 같은 직업의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않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하기 때문이다.

영웅을 갖지 못한 나라가 불행한 게 아니다. 영웅이 필요한 나라가 불행하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많다면 영웅은 구태여 필요 없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없는 나라는 필사적으로 영웅을 찾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가 이만큼 지탱되는 것은 알아주든 말든 일터에서 분투하는 ‘윤석덕’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분홍색 차선을 따라 주행하세요”라는 안내문은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을 향한 응원가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