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 하니가 지난 6월 26일 일본 도쿄돔에서 노래 ‘푸른 산호초’를 부르고 있다. /어도어 제공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가 지난 6월말 도쿄돔에서 1980년대 일본 국민 가요 ‘푸른 산호초’를 부른 영상은 지금도 조회수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뉴진스 오지상’으로 불리는 아저씨 팬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떼창하는 게 인상적이다. 수많은 영상은 대부분 이들이 현장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올린 ‘직캠’이다. 조회수 수백만 이상인 것이 수두룩하다. 달포 넘게 반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과 비슷한 연배인 필자 세대는 ‘우주소년 아톰’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999′를 보며 유년기를 보냈다. 방과 후 TV 만화 시청이 ‘국룰’이던 시절이다. 전부 일본 만화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김국환 아저씨가 주제가를 불렀는데 쪽발이 만화였다니”라며 격분하던 애들도 더러 있었다. 그토록 ‘왜색’을 비하·경멸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공중파 방송이 매일 일본 만화를 방영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어린 나이에도 의아했다.

일본 문화의 맛을 본 한국 10대는 저마다 ‘어둠의 경로’를 개척했다. 용산 전자상가와 명동 중국 대사관 앞 일본 책방 같은 ‘일본 문화 성지’가 지역마다 존재했다. 일본 콘텐츠에 용돈을 쓰면서도 그것을 떳떳하게 드러내진 못했다. 자칫 ‘친일파’ ‘매국노’로 매도되기 십상이었다. 음지에서 소비되던 일본 문화의 위상은 1998년 가을 갑자기 달라졌다. 국제 영화제 수상작들인 ‘카게무샤’ ‘하나비’ ‘우나기’에 이어 ‘러브레터’가 극장에 걸렸다. 출판물, 애니메이션, 음반, 게임도 한국에 순차 상륙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일각에선 퇴폐적 왜색 문화 범람, 한국 문화 붕괴를 우려했다. 과거 일본이 대중문화 개방을 압박할 때마다 정부가 내세우던 논리도 그랬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욘사마’ 열풍이 몰아쳤고, 일본에 진출한 가수 보아는 현지 음반 차트와 시상식을 휩쓸었다. ‘대장금’을 비롯한 K드라마와 영화, K팝 가수들의 해외 진출 소식이 이어졌다. 한류는 그렇게 태동했다.

김대중(DJ) 대통령은 한일 관계 개선에 의욕적이었다. 1998년 10월 일본 방문 당시 아키히토 일왕에게 ‘천황 폐하’라고 했다. 목포상고 시절 은사와의 만남에선 “센세 와타시데스, 아노 다이주(大中)데스요”라며 창씨개명의 흑역사도 셀프 소환했다. 하이라이트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즉 ‘김대중·오부치 선언’이었다. 정파를 초월해 지금도 ‘한일 관계의 금자탑’으로 인정되는 치적이다. 그 후속 조치 1호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었다.

한국에서 일본과 잘 지내자는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반일 정서에 편승하는 게 훨씬 쉽고 정치적으로 남는 장사다. 일본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망언을 일삼는 것과 같은 구조다. 역대 한국 지도자 대부분은 한일 관계 개선에 미온적이었다. 보수 대통령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일본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다. DJ마저 그런 풍조와 타협했다면 K콘텐츠 전성기는 훨씬 늦어졌을지 모른다.

물론 DJ에겐 큰 허물이 있다. 고난의 행군으로 휘청대던 김정일 정권이 햇볕정책 덕에 기사회생했다. 결과적으로 3대 세습과 핵·미사일 폭주, 인권 유린을 도운 셈이다. 이보다 악성은 ‘DJ 정신’을 잇는다면서 햇볕정책만 계승한 노무현·문재인 정권이다. 특히 죽창가 부르고 ‘노 재팬’을 선동하며 한일관계를 도륙낸 사람들과 DJ를 비교하긴 어렵다. 그런 DJ조차 K 팝 걸그룹 멤버가 된 베트남계 호주 소녀가 ‘푸른 산호초’를 불러 일본 중년의 40년 전 향수를 자극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