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법사위를 이끌면서 온갖 막말과 조롱, 모욕 주기식 진행으로 22대 국회 ‘빌런(악당)’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정 의원을 더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따로 있다. 작년 6월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가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할 때다. 본회의장 뒷자리에 앉은 그는 김 대표 연설 도중 “땅 대표, 땅, 땅, 땅!”이라며 의사당이 떠나갈 듯 반복해서 고함을 치며 연설을 방해했다. 김 대표가 “변화가 필요한 분야는 정치입니다”라고 하는 대목에선 “땅입니다”라고 소리쳤다. 곳곳에서 “킥, 킥”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는 히죽히죽 웃었다.
김기현 대표는 그 전 국민의힘 대표 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가 제기한 땅 투기 의혹으로 시달렸다. 25년 전에 산 임야 문제였다. 민주당도 ‘진상조사 TF’를 구성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경선이 끝나자 그 논란은 쏙 들어갔다. 정치 공세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연설할 때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끼어드는 것도 무례다. 하물며 청중석에 앉아 연설하는 내내 “땅, 땅, 땅. 땅 파세요”라며 외치는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연설에 오물을 끼얹으며 깽판을 치려는 것이다. 몰인격의 양아치나 할 법한 짓이다. 그러고도 정 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52%가 넘는 득표율로 또 당선됐다. 그러니 빌런을 자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스스로 처참한 인격을 드러내기에 차마 못 할 이런 행태가 정치 현장에서는 수시로 벌어진다. 우리 정치가 그만큼 저질화됐고 전쟁처럼 변했다는 말이다. 이는 지지층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핵심 지지층이 생활인으로서의 지지 집단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과 자신을 맹목적으로 일체화시키는 팬덤으로 바뀌었다. 그들 중에서도 더 핵심은 ‘개딸’과 같은 극렬 정치 훌리건들이다.
니체는 “신념은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라고 했다. 자신들이 정의라고 확신하는 집단은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문재인 팬덤 ‘문빠’들이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것 다 해”라고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반대 세력을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악마화·적대화한다. 그러니 아무리 비열한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해도 내부에선 환호받는다. 저질적인 행태가 더 심해지는 메커니즘이다.
저질화를 초래하는 팬덤 정치는 ‘노사모’ ‘문빠’ ‘조빠’(조국 팬덤) ‘개딸’로 대표되듯 진보·좌파 진영의 현상이었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법인가. 보수 진영에도 지지층의 팬덤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뚜렷이 존재를 드러낸 한동훈 강성 지지자들은 갈수록 ‘개딸’을 닮아가고 있다. 정점식 정책위의장 페이스북에 몰려가 ‘사퇴하라’는 댓글로 도배했고, 한 대표 의중을 모른 채 김경수 전 의원 복권에 긍정적인 의견을 밝힌 대변인에게 ‘문자 수류탄’을 퍼부었다. 보수 정치에선 없던 현상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팬덤의 행패를 “양념”이라고 감싸면서 팬덤 정치, 정치 저질화가 더 심해졌다. 진보·좌파 정당은 이제 유일 체제의 지도자와 그에 맹종하는 팬덤들의 놀이터처럼 변했다. 당대표 선거에서 99.9%로 당선된 조국, 85.4%로 당선된 이재명이 말해준다.
한동훈 대표는 보수 정치가 그런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팬덤의 맹목적 지지에 취해 그런 행태를 제어하지 않으면 보수에서도 제2, 제3의 정청래 같은 인물이 맹동(盲動)하면서 보수 정치를 저질화시킬 것이다. 오로지 승리만을 위한 싸움과 전쟁만 있고 갈등 조정과 타협을 통한 현안 해법, 미래의 비전을 도출하는 정치는 기대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