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부터 개방된 종묘 북신문. 19일 북신문을 찾은 시민들이 문을 통과해 종묘나 창경궁을 관람하거나 문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김태훈기자

조선 시대 동궐(東闕)로 불린 창경궁과 창덕궁은 원래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종묘와 이웃해 있었다. 1932년 일제(日帝)가 이 담장을 허물고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도로(현 율곡로)를 냈다. 총독부는 교통 편의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궁궐을 망가뜨려 식민지 조선인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자는 게 본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연결하는 복원 사업은 식민 잔재를 털어내고 문화·경제 강국으로 도약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서울시가 2010년 그 첫 삽을 떴다. 율곡로를 지하화했고 그 위에 담장을 다시 세웠다. 담장을 따라 덕수궁 돌담길 같은 산책로도 조성했다.

12년 걸린 이 사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왕이 동궐과 종묘를 오갈 때 통과하던 북신문(北神門) 복원이었다. 그런데 애써 복원한 이 문이 안타깝게도 지난 2년간 닫혀 있었다. 복원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던 시민들은 “동궐과 종묘가 연결됐다고 해서 왔는데 문을 통과할 수 없다니 속은 기분”이라며 어이없어했다. 필자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북신문을 시민에게 돌려줘야 복원한 취지가 살아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었다. 지난해부터 국가유산청이 변화 움직임을 보였다. “북신문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며 “창경궁 쪽 입구가 가팔라 사고 위험이 있으니 경사로를 만든 뒤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준비 과정을 끝내고 지난 9일, 한글날에 맞춰 마침내 북신문이 열렸다.

지난 토요일 시민 반응이 궁금해 현장에 가봤다. 가끔 들를 때마다 한적한 모습에 안타까웠는데, 그랬던 곳 맞나 싶을 정도로 방문객으로 붐볐다. 산책로엔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오갔고, 한복 차림의 외국인들도 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중년 부부는 “전에도 가끔 와서 익숙한 곳인데 문 하나 연 것만으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며 반겼다. 문 앞에서 안내하던 국가유산청 직원도 상기된 표정으로 “오전에만 수백 명이 문을 통과해 창경궁과 종묘를 오갔다”고 했다. 국가유산청에 확인해 보니 한글날부터 13일까지 닷새간 6000명 넘게 북신문을 방문했다. 지난주말에도 2800여 명이 다녀갔다. 국가유산청 측은 “창경궁과 종묘를 찾은 전체 방문객의 10%가 북신문 통로를 이용했다”며 “이렇게 많은 시민이 찾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일부에선 망한 왕조의 못난 과거를 왜 돈 들여 되살리느냐고 한다. 그런 이들은 문화유산이 단순한 과거 흔적이 아니라 우리의 오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란 사실을 간과한다. 잘살면서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방치하는 나라는 없다. 반면 나라가 변변치 못하면 찬란했던 과거도 버려지고 빛을 잃는다. 2차대전 당시 약소국이었던 폴란드는 나치 독일에 철저히 파괴됐다. 수도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궁성도 폐허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는 오랜 복원 노력 끝에 궁성의 옛 모습을 되살렸다. 동유럽의 부국으로 발돋움한 국력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 폴란드인들은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바르샤바를 자랑스러워한다.

북신문 나들이에 나선 시민들을 보며 유적 복원의 참뜻을 생각해봤다. 과거 유적과 유물은 멀찍이서 눈으로만 보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추세는 국민이 다가가 느끼고 체험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북신문 개방은 그 흐름을 반영한 문화 행정이다. 다만 공휴일과 ‘문화가 있는 날’(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만 개방하는 것은 아쉽다. 아무 날이나 찾아도 늘 문 열고 맞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북신문은 작은 문이다. 하지만 일제는 그 작은 문을 기어코 부쉈고, 우리는 그 문을 끝내 되살렸다. 국민 품으로 돌아온 북신문을 통과할 때, 식민과 전쟁·가난을 딛고 선 기적의 우리 현대사가 내 몸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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