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할 겁니다.” “에이, 설마요.” 전직 농구 지도자들과 가진 자리였다. 화제는 얼마 전 중징계를 받은 한 프로 농구 감독. 선수를 (수건으로) 때리고 욕하고 전화까지 걸어 괴롭혔다는 게 징계 사유. 일반 회사로 치면 악성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 프로농구연맹에서 2년 자격 정지를 내렸는데 그게 너무 가혹하다는 투였다. 개인적으론 ‘저런 폭력 감독은 영구 추방(제명)해야지. 겨우 2년…’이라고 느꼈는데 내부자들에겐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오래전 한 농구 팀 연습 과정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기자가 왔다는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그 팀 감독은 실수한 선수들을 불러 뺨을 때리고 폭언을 퍼붓기 일쑤였다. 옆에 있던 팀 관계자가 겸연쩍은 듯 귀띔했다. “오늘은 그래도 기자님 계시니 좀 약하게 하는 것 같은데요….” 이런 풍토에 젖어 있다 보니 ‘애(선수)들 때리는 감독이 쟤뿐인가’ ‘옛날엔 더 심했어’ 같은 한가한 반응이 나오는 셈이다. 그러니 ‘억울할 것’이란 당혹스러운 해석도 나올 법하다.
아무리 그래도 억울하다니. 억울은 원래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또는 그런 심정’을 뜻한다. 그러니까 잘못한 게 없어야 억울한 법인데 우리 사회에선 그와 무관하게 그저 섭섭하고 서운하고 야박하고 그런 복잡한 심경을 억울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주관적 감정이 꼭 들어간다. 뭔가 안 좋은 대접(처분)을 받았는데 그게 ‘공정하지 않다’고 ‘주관적’으로 느낄 때 ‘억울하다’는 하소연으로 이어진다.
다 과거 불공정한 체계 속에 울분을 삼켰던 사람들이 즐비했던 이 사회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업보라 한탄해 보지만 문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은근히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일전에 교정 행정 담당자들에게 들었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교도소”란 우스개가 떠올랐다.
지난달 말 은퇴식을 가진 한 고참 배구 선수도 과거 폭행 사태로 고초를 겪은 인물이다. 그는 국가대표 시절 코치가 멍이 들도록 때리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자 견디다 못해 기자회견을 열고 폭행 사건을 공개 고발했다. 이 과정에서 대표팀 감독에게 폭행 사실을 먼저 알렸으나 그 감독은 피해 선수를 달래고 문제를 키우지 않으려 급급했다고 알려져 있다. 배구협회도 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당 코치는 결국 징계를 받긴 했으나 나중에 사면됐고, 프로 팀 감독까지 맡았다. 감독을 맡은 뒤에도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보단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그 사건을 언급하다 피해 선수가 “피가 거꾸로 솟는다”면서 반발하고 논란이 되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어딘지 이번 농구계 폭행 사건을 둘러싼 분위기와 비슷하다.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부조리하고 폭압적인 지배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명백한 잘못을 반성하기 앞서 매몰찬 대우에 불만부터 표시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조직 운영 난맥상과 비리 의혹이 드러나고, 직무 정치 처분까지 받은 일부 체육 단체 수장들이 들끓는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더 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아마 그들도 나름 억울하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 억울은 마찬가지로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인식 사이 간극에서 비롯된 감정일 가능성이 높다. 다들 일반인들 눈높이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자신과 관련한 흠결에 대해선 관대하고, 뭘 그리 잘못한 일이냐 항변한다. 그리고 원래 하던 대로 행동한다. 확증 편향에 자기 과신까지 겹친 모양새다. 비단 체육계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