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4일 한·미 고위급 회의에서 한국에 화웨이(華爲) 등 중국 통신업체 제품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미 정부 고위 인사들이 한국에 반중(反中) 전선 동참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적은 있지만, 양자 간 공식 회담에서 이 같은 뜻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우리 정부는 “검토가 필요하다” “민간이 결정할 문제”라며 즉답을 피했다. 중국 견제용 안보 협의체 ‘쿼드(Quad)’ 참여를 비롯해 미국의 반중 캠페인 참여 요구가 갈수록 거세지는 가운데 동맹인 한국이 어정쩡한 태도로 미국과 엇박자를 내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화웨이 로고가 스마트폰 위에 새겨져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외교부는 이날 오전 이태호 2차관과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이 수석대표로 참석하는 제5차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SED)를 2시간 40분 동안 진행했다고 밝혔다. 마크 내퍼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등 40여명의 대표단을 배석시킨 미국은 이 자리에서 ‘클린 네트워크’ 추진의 당위성과 함께 한국의 동참을 적극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 네트워크는 5G 통신망이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 정보 기술(IT) 분야에서 중국 기업을 배제하겠다는 프로젝트로, 현재 30개 이상 국가와 통신사들이 가입해있다.

미국은 그동안 “화웨이가 안보를 위협한다”며 동맹들의 동참을 요구해왔다. 미 국무부는 화웨이와 거래 중단을 선언한 SK텔레콤·KT를 ‘클린 이동통신사’ 명단에 넣은 반면, 여전히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LG유플러스는 명단에서 뺐다. 로버트 스트레이어 사이버·국제통신정보 담당 부차관보는 지난 7월 “LG유플러스 같은 회사들에 믿을 수 없는 공급자로부터 벗어나 신뢰할 수 있는 공급자로 옮길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이날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제하라는 형태의 협의는 이뤄지지 않았다”면서도 “미측 입장에 대해선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LG유플러스와 관련해선 “특정 업체(화웨이)를 사용하느냐 안 하느냐는 문제는 관계 법령상 민간 기업이 결정할 사항”이라며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다만 반중(反中) 경제 블록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관련 내용은 회의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화웨이 제재를 비롯한 경제·기술 분야 외에도 미국의 반중 캠페인 동참 요구는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공화·민주당 할 것 없이 미국 내 초당적인 반중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동참 요구는 갈수록 빈번해질 것이란 관측이다. 우리 정부는 외교전략 조정회의 등을 통해 ‘안보는 한·미 동맹, 경제는 개방’이라는 대원칙은 세워 놓았지만 구체적인 대응에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앞서 인도를 방문 중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은 12일(현지 시각) “쿼드(미·일·인도·호주 4자 외교안보 협의체)는 다른 나라에도 열려있다”고 했다. 회원국을 늘려 쿼드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공식 기구화하겠단 구상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앞서 쿼드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거란 전망이 계속 나오고 있다. 14일 SED 회의에선 인프라·개발·에너지 자원 분야에서 우리 정부의 신남방 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연계하는 협력 방안도 논의됐다고 외교부는 밝혔다.

이런 가운데 마셜 빌링즐리 미국 군축 담당 대통령 특사는 13일(현지 시각) “아시아의 친구들과 동맹들은 중국의 공격을 억제하고 자국의 국가 안보를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빌링즐리 특사는 이날 미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 세미나에서 “아시아에는 분명히 중국의 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엄청난 우려가 있고 중국의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 탄도미사일이 모두 해당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초까지 한국·일본·베트남을 연쇄 방문했던 그는 “서울·도쿄와 하노이에서 모두 좋은 면담을 했다”며 “우리가 미사일 방어와 중거리 억지 시스템을 통해 우리 전력을 향상해 감에 따라 (한국을 포함한) 이런 나라들과 긴밀히 상의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작년 8월 미·러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파기 이후 개발 중인 지상발사형 중거리 미사일의 배치 여부 등을 논의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반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13일 쿼드에 대해 “미국이 제안한 ‘인도·태평양판 나토’는 시대에 뒤떨어진 냉전식 사고방식을 부추기고 지역 간 대립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미국의 화웨이 제재에 대한 반격의 성격으로 ‘새 데이터 안보 국제 기준’ 구상도 준비하고 있다. 앞서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달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과 함께 글로벌 데이터 보안을 구축하고자 한다”고 했다. 전직 외교부 고위 간부는 “정부는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말하지만, 미·중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서 사안별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