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14일(현지 시각) 미 국방부에서 열린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을 놓고 충돌했다. 공동성명에선 지난해와 달리 ‘주한미군의 현 수준 유지’란 표현이 빠졌고, 예정됐던 양국 국방장관의 기자회견도 취소됐다. 인도·태평양 안보 협의체 쿼드(Quad) 등 최근 각종 현안을 놓고 양국 입장 차가 커지는 가운데, 미국의 불만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이날 모두 발언에서 “미군의 안정적 한반도 주둔을 보장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 합의에 도달할 필요성에 모두 동의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시작돼 1년 넘게 교착 상태에 있는 제11차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이 타결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의 주둔 자체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실제 올해 공동성명에는 2008년부터 줄곧 명시된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미국의 요구로 12년 만에 빠졌다. 이 때문에 미국이 방위비 협상과 주한미군 감축을 연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에스퍼 장관은 우리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완료를 추진하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해서도 “작전권을 한국군에 전환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맞추는 것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미국을 방문해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났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도 면담할 예정이다.
美, 방위비에 쌓인 불만 폭발… 주한미군·전작권도 압박
14일 열린 제52차 한미 안보협의회(SCM)는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모두 논란을 불렀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과 함께 주한미군 감축을 시사하는 미국의 입장도 감지됐다. 여기에 한미 국방장관 기자회견은 미국의 ‘내부 사정’으로 돌연 취소됐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부터 쿼드 같은 반중(反中) 캠페인까지 각종 현안에 대한 양국의 시각 차가 표면화하면서 미국의 불만이 분출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방위비 분담 - 美 국방장관 “방위비 부담 美 납세자에게 불공평, 빠른 합의 필요”
이날 최대 현안은 방위비 분담금 문제였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모두 발언에서부터 “방위비 부담이 미국 납세자에게 불공평하게 떨어져선 안 되고 한반도에 미군의 안정적 주둔을 보장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빠른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9월 개시된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은 한국의 분담금 50% 인상을 요구하는 미국과 13%를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우리 정부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1년째 타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서욱 장관은 모두 발언에서 방위비를 언급하지 않았다.
에스퍼 장관이 이날 ‘미군의 안정적 주둔’을 거론한 것은 향후 한미 관계에서 주한미군이 상수가 아닌 변수로 다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한미 정상회담 이후 SCM 공동성명에 매년 명시됐던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고 전투 준비 태세를 향상하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하였다”는 표현도 올해는 삭제됐다. 이 때문에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조속히 타결되지 않을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 미군 감축을 연계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운용의 융통성을 갖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지난 7월 주독미군 감축을 발표하며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의 향상’을 이유로 들었다.
◇주한미군 - 트럼프 정부, 지난 7월 주독미군 감축 발표… 한국도 가능성
미국은 또 한반도 방위를 위한 ‘보완 전력(bridging capability)’을 우리 군의 무기 확보 계획과 연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보완 전력은 U2 정찰기 등 감시·정찰 자산,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같은 미사일 방어 능력을 의미한다. 전작권 전환 전에는 돈을 받지 않고 지원하겠다고 했던 기존 입장에서 선회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자국의 비용 부담을 줄이면서 한국의 책임을 더 요구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공동성명에는 “한국의 획득 계획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이 SCM에서 이같이 불만을 표시한 데는 최근 각 분야에서 삐걱거리는 한미 관계의 기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방미 중인 서훈 국가안보실장을 만나 “우리의 철통(ironclad) 같은 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수사에도 한미는 공동 안보 체제를 가동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본적인 훈련까지 못 하고 있다.
◇對中관계 - 美 국무차관 “中, 약한 가젤만 노려… 일대일로 참여땐 황폐화”
여기에 우리 정부는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추진 중인 다자 안보 협의체 쿼드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또 화웨이 등 중국 IT 기업을 배제하는 ‘클린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검토해 봐야 한다”고 했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부차관보는 VOA(미국의 소리) 방송에 “워싱턴에선 서울이 점점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런 미국의 압박을 두고 트럼프 행정부의 특수성을 얘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미 동맹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으로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성향이 동맹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반중(反中) 캠페인의 경우 공화당, 민주당 할 것 없이 초당적인 기류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트럼프 재선 여부와 상관없이 압박이 거세질 것”이라고 했다. 반(反)중국 경제블록 ‘경제번영네트워크(EPN)’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차관은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 공산당은 언제나 무리에서 약한 가젤을 노리지만 세계가 단결하면 보복할 수 없다”며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한 (개발도상)국가들을 황폐화시킬 팬데믹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은 조약에 의해 맺어진 유일한 한국의 동맹국”이라며 “한국은 자국의 국가 안보를 위해 클린 네트워크에 반드시 동참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