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의 당선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각국에 ‘네거티브 캠페인(낙선 운동)’을 펼치는 것으로 26일 알려졌다. 청와대와 외교부가 각국에 ‘유명희 지지’를 호소하는 총력 외교에 나선 것도 일본의 방해 공작이 이번 선거의 막판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여권(與圈)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벌인 ‘반일(反日) 몰이’가 1년 만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달 출범한 일본 스가 내각은 유 본부장이 차기 WTO 사무총장이 되는 게 일본의 여론과 국익에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유 본부장은 일본이 지난해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출 규제를 취하자 이를 WTO에 제소하는 일을 책임졌는데, 그가 WTO 수장이 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유 본부장이 당선되면 수출 규제 소송은 물론 다른 분쟁 해결 절차에서 일본이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후보도 내놓지 못하고 뭘 했느냐”는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도 우려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 외무성은 이번 WTO 사무총장 선거전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유럽과 중남미, 아시아 국가에 유 총장을 지지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수출 규제 문제로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사무총장을 배출하면 WTO가 공정성을 의심받는다는 논리를 개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개도국에는 일본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거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교도통신은 25일 일본 정부가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유 본부장과 경쟁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고 일본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26일 정례 브리핑에서 나이지리아 출신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국제기구 선거 투표에 대해서는 각국이 외교상 이유로 밝히지 않는 대응을 하고 있다”며 부인하지 않았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정세균 국무총리 등이 다른 나라의 정상들과 전화·서신 외교를 하며 총력전을 벌이는 것은 일본의 네거티브 캠페인 동향을 포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정부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을 팀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이 매일 2~3건의 관련 일정을 소화할 정도로 이번 선거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컨센서스(만장일치) 방식으로 사무총장을 추대하는 WTO 선거 특성상, 일본이 끝까지 한국에 반대할 경우 유 본부장이 선출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정부 주변에선 “지난해 여권이 대대적인 반일·불매운동에 앞장섰던 것이 뼈아프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우리 정부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관련 WTO 분쟁에서 일본에 승리했을 당시 청와대가 “전례 없는 승리” 등의 표현으로 일본을 자극한 것도 유명희 후보에 대한 공정성을 문제 삼는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전직 외교부 간부는 “예상을 깨고 (유 본부장을) 최종 라운드까지 진출시킨 것은 고무적이지만, 일본의 비토(veto)로 당선되지 않을 경우 대일 외교 책임론이 불거질 것”이라고 했다. 차기 사무총장 선출을 위한 투표는 27일 시작돼 이르면 다음 달 초 윤곽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가운데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26일 소집된 임시국회 개회식 연설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인근 국가”라며 “양국이 건전한 관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의 일관된 입장에 근거해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해 가겠다”고 밝혔다.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책임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