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오후 6시 30분 추미애 법무장관이 제청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2개월 정직’ 처분을 재가하면서 “검찰총장 징계라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게 된 데 대해 임명권자로서 무겁게 받아들인다. 국민들께 매우 송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검찰이 바로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추미애·윤석열 갈등과 이에 따른 윤 총장 징계에 대해 임명권자로서 송구하다고 하면서도 윤 총장 징계는 불가피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문 대통령은 “검찰총장 징계를 둘러싼 혼란을 일단락 짓고, 법무부와 검찰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1년 5개월 전 “우리 총장님”이라며 임명했던 윤 총장을 사실상 ‘식물 총장'으로 만드는 문서에 직접 사인을 했다. ‘적폐 청산' 과정에서 문 대통령의 칼 역할을 했던 윤 총장은 원전과 울산시장 선거 의혹 등 정권을 겨냥한 수사를 하면서 ‘미운털'이 박혔다. 추미애 장관이 전면에 선 징계 과정에서 윤 총장은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문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라운드는 ‘정치적 경쟁’이 될 거란 관측이 나온다.
추 장관은 이날 오후 5시쯤 윤 총장 징계안을 들고 청와대를 찾았다. 문 대통령은 1시간 30분 만에 여기에 서명했다. 법무부 징계위원회가 이날 새벽 4시쯤 정직 결정을 내린 지 14시간 30여분 만이다. 추 장관은 본인의 사의도 표명했다. 정만호 수석은 이날 “검사징계법에 따라서 법무부 장관이 징계 제청을 하면 대통령은 재량 없이 징계안을 그대로 재가하고 집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징계 수위를 낮추거나 높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윤 총장 징계 과정에 여러 번 등장했다. 문 대통령은 고기영 전 법무차관이 추 장관의 윤 총장 징계에 반대하며 사퇴한 지 하루 만에 이용구 차관을 임명하며 끊어질 뻔한 ‘징계의 다리'를 이어줬다. 문 대통령은 ‘편파 징계' 논란이 일자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이 매우 중요하다”며 진화에 나섰다.
문 대통령과 윤 총장은 2019년 7월 윤 총장을 검찰총장에 임명할 때만 해도 끈끈한 관계였다. 윤 총장은 2016년 말 최순실 특검의 특별수사팀장을 맡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을 파헤치며 사실상 문 대통령의 집권을 도왔다. 문 대통령은 이런 윤 총장을 ‘기수 파괴’ 인사로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에 연달아 발탁했다. 문 대통령이 “살아있는 권력도 엄정하게 수사해달라”고 할 정도로 그를 믿었다.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작년 9월 ‘조국 사태’였다. 윤 총장이 청와대의 조국 전 법무장관 임명에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후 검찰은 조 전 장관 자녀 입시 부정, 사모펀드 의혹 등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조 전 장관 후임으로 추미애 장관을 임명하고 윤 총장 견제를 시작했다. 이후 검찰에선 울산시장 선거 공작, 옵티머스·라임 사기,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등 정권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사가 이어졌다. 윤 총장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문 대통령이 적절한 메신저를 통해 임기를 지키라고 했다”고 주장했지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들은 바 없다”고 했고 추 장관은 윤 총장 징계를 밀어붙였다.
정치권에선 윤 총장 징계가 결정된 16일 이후로는 ‘추미애 대 윤석열’이던 대결 구도가 ‘문 대통령 대 윤 총장’의 구도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문 대통령이 징계를 집행하고 윤 총장이 법적 대응에 나서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임기 말 정국 운영에 ‘윤석열 변수'가 태풍의 핵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란 얘기다.
문 대통령은 윤석열 ‘화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었다. 윤 총장 임명 당시 한국갤럽 기준 48%(2019년 7월 4주)였던 지지율은 38%(올 12월 2주)로 10%포인트 떨어졌다. 그 사이 윤 총장은 이낙연·이재명 등 여권 주자를 위협하는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윤석열 제거'로 검찰 개혁이라는 숙원을 해결한 측면이 있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문 대통령이 레임덕으로 빠져드는 신호탄이 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