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 사업이 6·25를 ‘내전(內戰)’으로 표현하고 북한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언급하지 않는 등 편향된 역사관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것으로 22일 나타났다. 해당 사업엔 국민 세금 400억원이 투입됐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는 최근 6·25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진실과 화해의 숲’ 국제 설계 공모 당선작을 선정했다. 공모엔 42국 109팀이 참여했다. 그런데 공모위원회 공식 홈페이지에서 주최 측은 ‘공모 배경'을 설명하며 6·25 민간인 학살이 대부분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서술했다. 주최 측은 “북측 민간인 희생자 150만명 중 약 90%는 대부분 (미군) 네이팜탄 공습으로 인한 소사자(불에 타 숨진 사람)와 댐 파괴로 인한 익사자들인 반면 남측 50만 민간 희생자들 중 약 30만명은 놀랍게도 군경과 적대적 민간인들에 의한 대량 학살로 죽어갔다”고 했다.
이어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남쪽 진영은 보도연맹 가입 경력자, 북측 포로, 북측 점령기의 부역자 그리고 15년형 이상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죄수들을 처형했다”며 “좌익의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전격적으로 집단 처형을 당했다. 전쟁 기간 내내 이러한 일들은 남북한 전역에서 자행됐다”고 했다. 주최 측이 언급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일부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주최 측은 북한의 민간인 학살 범죄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십~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1955)에 따르면 남한 지역 민간인 학살 희생자는 12만8000여 명이다. 상당수가 북한군 소행으로 추정된다. 전쟁 당시 평양·원산·함흥·수안 등 북한 지역에서도 ‘반역자를 처단하라’는 김일성 지시에 따라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그러나 주최 측은 이 역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공모 배경 설명만 보면 마치 민간인 학살 책임이 모두 한국 정부에 있다는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6·25의 성격을 북한의 불법 남침(南侵)이 아니라 ‘내전’ ‘대리전’으로 규정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6·25 내전’은 북한과 수정주의 사관 추종자들이 ‘북한의 침략 전쟁, 남침'을 물타기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다. 주최 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년, 일본 제국주의 강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한민국을 수립한 지 2년 만에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은 짧은 기간 최대의 인명 피해를 세계사에 기록한 내전” “남과 북의 내전은 세계를 양분한 냉전 체제의 대리전까지 치르게 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며 확전” 등의 표현을 썼다. 6·25에 대한 이 같은 주최 측의 인식은 영문으로 그대로 번역돼 세계 건축계에 전달됐다.
‘진실과 화해의 숲’은 2010년 진실화해위가 1기 사업을 마무리하며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과 위령시설 건립 등을 정부에 권고함에 따라 추진되는 사업이다. 지자체 공모를 거쳐 6·25 당시 보도연맹 학살 현장이었던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 일대를 부지로 선정했다. 총사업비 402억원을 투입했다. 2024년 부지 면적 9만8000여㎡, 건축 연면적 3800여㎡ 규모로 완공 예정이다.
행정안전부는 “해당 업무는 대전 동구에서 전담했다”며 ”그런 식의 서술은 심각한 문제이고 동구 측에 수정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대전 동구는 “공모의 총괄 기획을 맡은 명망 높은 전문가의 글을 수록한 것인데, 함부로 수정할 수 없었다”며 “6·25에 대한 그런 식의 서술에 결코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