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박이 북한에 석유를 밀수출하다 중국 당국에 1주일간 억류 및 승선 검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측은 해당 선박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를 위반했다며 선박을 점거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에서 대북 제재 상습 위반국으로 비난받는 중국에 한국이 ‘제재 위반’ 현장을 발각돼 수색까지 받은 것이다.
23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 국적의 석유화학제품운반선 L호가 지난 12일 중국 마카오 인근 해상에서 중국 해경에 억류됐다. 이 선박은 화물적재톤수 9000t급으로 당시 한국인 4명을 포함해 20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중국 해경은 L호가 바다 위에서 유엔 대북 제재가 금지하는 불법 선박 간 환적(ship-to-ship transfer) 수법으로 북한에 석유를 판 정황을 포착하고 추적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L호는 1주일여간 검색을 당한 뒤 지난 주말 풀려났다.
유엔 안보리 결의 제2397호에 의해 북한은 연간 50만 배럴(약 6만6500t) 이하의 정제유만 수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해상 환적 등 불법 경로로 국제사회 감시망을 피해 최대 160만 배럴을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 선박이 대북 제재 위반 혐의를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에는 역시 선박 간 환적으로 북에 석유를 밀수출하던 한국 선박이 미국·일본에 포착됐다. 하지만 대북 제재의 최대 방해국인 중국에서 우리가 ‘제재 위반’ 지적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정부 소식통은 “개별 선박의 일탈 행위라도 우리 정부에 감시 책임이 제기될 수 있다”고 했다.
‘인권무시’ 이어 ‘제재위반’ 오명까지
한국 국적 선박이 북한에 석유를 밀수출하다 중국 당국에게 승선검색을 당한 것은 ‘도둑질하다 더 큰 도둑한테 걸려 망신당한 상황’이나 다름없다. 중국은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를 노골적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에 식량과 원유 등을 제공해왔다.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에 따르면 중국의 제재 위반 사례는 올해 적발된 것만 60건이 넘는다. 제재 위반 주범(主犯) 격인 중국이 ‘제재 위반’을 걸어 한국 선박을 바다 위에서 검색한 것이다.
중국의 해상 승선검색은 안보리 결의 2375호 7항에 근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유엔 회원국은 특정 선박이 제재 위반을 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있다면 공해(公海)상에서 선박 소속국의 동의하에 승선검색을 할 수 있다. 중국은 지난 12일 우리 선박을 억류할 때 우리 정부에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선원들의 휴대전화도 압수했다고 한다.
대북 제재를 사실상 무시하고 있는 중국이 무리한 방법으로 우리 선박을 검색한 것은 미국을 향해 ‘우리만 문제 삼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경제 제재를 북핵 해결의 핵심 레버리지로 여기는 미국은 최근 중국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무부 관료들은 북한 선박들이 지난 1년 동안 중국 닝보-저우산으로 수백 차례 석탄을 직접 실어날랐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북한의 석탄 수출은 유엔 제재로 금지돼 있지만 중국의 묵인하에 올해 3분기까지 4000억원을 챙겼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타깃으로 삼고 있지만, 중국은 한국의 위반 사례를 확보해 “핵심 당사국인 한국부터 ‘구멍’이 뚫려 있지 않으냐”고 반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우리 선박의 제재 위반과 정부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국적의 선박이 제재 위반에 연루된 사례가 잇따르는 것은 우리 정부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는 요소다. 게다가 2018년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후 국제사회는 한국의 제재 이행 의지를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과정에서 석유 제품을 반출한 사례 등을 모두 ‘제재 위반’으로 규정했다. 정부 소식통은 “안 그래도 대북 전단 금지법 문제로 인권, 표현의 자유 억압 지적을 받고 있는데 자칫 ‘대북 제재 위반국’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