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 통화에서 “시진핑 주석의 견고한 지도 아래 중국이 방역에서 성공을 거두고 전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한 국가가 됐다”고 말했다고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27일 보도했다. 또 중국은 “중국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문 대통령의 언급도 공개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도자가 공산당 창당일을 6개월 앞두고 ‘진심 축하’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바이든 미 행정부가 최우선 외교 정책으로 중국 견제를 위한 ‘전 세계 민주주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약한 고리’인 한국을 흔들어 이탈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 매체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중국의 국제 지위와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으며, 두 번째 100년의 분투라는 목표 실현을 향해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했다. 중국은 공산당 창립 100주년인 2021년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00주년인 2049년을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인민일보는 이날 두 정상의 통화를 1면 오른쪽 머리기사에 배치했다. 신화통신과 CCTV 등 관영 매체도 관련 기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문 대통령 발언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것이다. 반면 우리 측이 공개한 시 주석의 “남북, 북·미 대화 지지” “조기 방한 성사” 등 발언은 중국 측이 보도하지 않았다. 40분간 이어진 통화는 중국 측이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청와대는 “양국이 협의한 것”이라고 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날 한·중 정상의 통화를 분석한 기사에서 “한국을 민주국가들의 반중(反中) 연합에 끌어들이려는 바이든 미 행정부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중국의 매력 공세”라고 평가했다. 중국이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 정부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을 의식한 듯 청와대는 “한국과 중국의 설 연휴 및 춘절을 앞둔 신년 인사였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의미를 축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앞선 시 주석과의 통화가 ‘의례적 행사'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통화 직후에는 짧은 서면 브리핑 자료만 냈다가 중국이 두 정상 간 통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뒤늦게 내용을 추가 공개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공산당 100주년 축하’ 등은 뺐다. 청와대 관계자는 “통상적인 덕담”이라고 했다. 청와대는 한·미 정상 간의 통화도 조속하게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서로 다른 곳 보는 동맹… 미국은 北·中 압박, 한국은 美·北대화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과 함께 한·미 외교안보 채널의 정책 협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양국은 ‘동맹 강화’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북핵·중국 등 핵심 이슈에서 우선순위·방향에 대한 시각차를 노출했다. 미국이 대중(對中) 견제를 위한 한국의 협조와 대북 제재·압박 유지에 무게를 두는 동안,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유산인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 계승을 강조했다. 바이든 외교안보팀 주요 포스트에 대북 강경파가 속속 들어서면서 한·미 사이의 마찰음이 본격적으로 불거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韓 발표엔 미 강조 ‘인도·태평양’ 없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7일 상원 인준을 받고 취임한 뒤 바로 캐나다, 일본, 한국 순으로 통화를 했다. 미측 발표에 따르면 블링컨은 강경화 외교장관과의 통화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위한 동맹의 역할’을 먼저 강조한 뒤 ‘한·미·일 3자 협력 지속’ ‘북한 비핵화의 필요성 지속’을 언급했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만든 ‘인도·태평양’ 용어를 앞세워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최우선순위가 어디 있는지를 확실히 한 것이다. 또 한·미·일 삼각 협력 강조 역시 ‘동맹을 규합해 중국에 맞선다’는 외교 기조에 동참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반면 한국 외교부는 보도자료에서 인도·태평양, 한·미·일 협력 내용은 뺀 채 “북핵 문제가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시급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데 공감했다”고 했다. 미국이 빨리 ‘싱가포르’ 때처럼 북한과 다시 마주 앉는 그림에 대한 기대를 표출한 것이다.
이런 시각차는 전날 한·중 정상 통화와 맞물려 논란을 더 키울 전망이다. 이날 통화로 문 대통령이 동맹인 미국보다 중국과 먼저 대화하며 ‘시진핑 주석 리더십’을 칭송하는 모양새가 연출됐다. 중국은 미국의 반중 연대에서 ‘약한 고리’ 한국을 흔들려는 속내를 드러냈고, 한국은 이에 맞장구를 친 셈이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미 조야에서 한국이 중국에 기울고 있다는 의구심이 점점 커질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강경책을 그대로 잇고 있다. 지나 러만도 상무장관 후보자는 이날 인준 청문회에서 “중국의 행동은 반경쟁적이고 미국 근로자와 미국 기업에 손해를 끼치고 잔혹한 인권 침해로도 비난받을 만하다”며 “중국의 불공정 관행에 경쟁할 수 있도록 공격적으로 나가겠다”고도 했다.
◇대북 강경파들 속속 국무부 합류
미 국무부의 주요 포스트가 모두 대북 강경파로 채워진 것도 향후 한·미의 간극을 더 벌려 놓을 가능성이 있다. 이날 정 박 전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로 합류했다. 그는 ‘김정은 비핵화 의지’ ‘싱가포르 회담’ ‘대북전단 금지법’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해온 인사다. 그는 저서와 기고문을 통해 “김정은의 관심은 평화가 아닌 갈등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반(反)북한 연설이나 활동을 약화시키는 데 권력을 사용했다”고 했다.
이 같은 인식은 바이든 대북 라인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협상 경험이 많은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 성 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대행 등은 북한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는 ‘어게인 싱가포르’를 외치지만 바이든 팀 머릿속에는 싱가포르가 아니라 ‘2·29 합의’가 있다”고 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2년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 유예 대가로 식량 원조를 한다는 ‘2·29 합의’를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은 불과 2주 만에 이를 깨버렸고, 미국은 이후 ‘전략적 인내’로 대북 기조를 바꿨다. 이 소식통은 “바이든 팀에 싱가포르 합의는 북한의 핵보유 의지를 재확인한 쇼나 다름없다”며 “그런데도 줄기차게 ‘싱가포르 정신 계승’을 요구하는 문재인 정부를 바이든 측이 어떻게 보겠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