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업계의 살길을 모색하고자 북한에 원전을 짓자고 제안했던 탈원전 반대 시민단체가 당시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과 장하성 정책실장에게 북한 원전 건설을 제안하는 서신까지 보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 제안을 묵살하고 오히려 관련 부처에서는 이 단체를 지속적으로 뒷조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는 이 단체가 탈원전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제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추후 산업통상자원부를 통한 독자적 북한 원전 건설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 관계자들은 “탈원전에 반대하고 싶지만 당시 정부의 서슬이 퍼레서 그나마 살길을 찾아 원전 해외 수출이라는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췄는데 오히려 정부는 우리를 뒷조사했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이번 북한 원전 지원 논란에서 산업부가 뒷조사한 것으로 알려진 시민단체는 탈원전에 반대하는 교수들과 한국수력원자력 노조 관계자들이 모인 ‘원전수출국민행동’(원국행)이다. 이들은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업계가 고사할 위기에 처하자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2018년 2월 청와대에 ‘북한에 원전을 지원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지난 2월 1일 산업부가 공개한 A4용지 6장 분량의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방안’ 문서 작성보다 3개월이나 앞선 시점이다. 수신인은 임종석 당시 대통령비서실장과 장하성 정책실장이었다. 서한에는 ‘북한 전력난도 해소할 수 있다’며 ‘30분만 시간을 내 달라’는 식으로 북한에 원전을 짓자고 제안하는 내용이 두세 줄가량 적혀 있었다. 전체 편지 분량은 A4용지 한 장 정도다.
이 서한의 발신인으로는 원국행 대표이자 본부장인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가, 부본부장인 이병령 박사(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가 함께 이름을 올렸다. 원국행 한 관계자는 “이병령 박사 쪽 관계자 중 한 명이 아는 청와대 비서관이 있다고 해서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 편지가 청와대 어디까지 전달됐는지, 비서실장에게 전달이 되긴 했는지 아직까지 모른다”고 말했다.
북한 원전 건설을 제안한 편지에 대한 청와대의 답은 오지 않았고, 이병령 박사 측도 더 이상의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드러나는 북한 원전 관련 논란을 보면 청와대는 탈원전 반대 단체의 제안은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북한 원전 지원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탈원전 단체는 사찰까지 받았다는 의혹이 번지고 있다.
“산업부가 왜 우리 집회 관련 서류를 갖고 있었나”
산업부는 이 단체가 작성한 광화문 행사 신청서 파일도 보관하다 삭제한 것으로 알려진다. 2018년 4월 원국행의 원전 수출대회 당시 집회신고 관련 서류를 당국에 제출한 관계자는 “내가 서울시하고 종로서에 낸 집회신고 서류를 산업부가 갖고 있다가 삭제했다”며 “현재도 산업부에서 ‘당시 집회 관련 서류를 내라고 원국행에 공문을 보냈다’고 뒤늦게 전화가 오는데 우리가 집회신고서를 경찰도 아닌 산업부에 낼 일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원국행 다른 관계자는 “당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워낙 거셌기 때문에 원국행은 어떻게든 원전 해외 수출이라도 하자면서 정부에 코드를 맞추고 ‘좀 잘해 보자’ 이러는 과정이었는데 산업부가 우리의 집회 관련 서류를 갖고 있다가 삭제한 걸 보면 도리어 원국행을 사찰한 것”이라고 말했다.
원국행 관계자들이 청와대에 ‘북한에 원전을 지원하자’고 제안했던 이유는 당시 원전 업계가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고사 위기에 내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국행의 주축은 전국 원자력 관련 학과 교수들과 한수원 노조 관계자들이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5월 출범 직후부터 탈원전 정책을 펴왔고, 원전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하면서 원자력 관련 학과 교수들과 한수원 관계자들은 당장 일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내몰렸다. 이 때문에 이들은 언론 등을 통해 탈원전 정책의 허구성과 우리 원전 기술의 우수성을 설파해 왔다.
2017년 여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조사 결과가 ‘건설 재개’로 나왔지만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면서 원전 업계는 더욱 위기에 처했다. 이에 황일순 교수,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등 탈원전에 반대해 온 원자력 관련 교수들은 원자력 전국 16개 대학교 교수와 학생들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민단체 ‘원국행’을 만들었다. 좌장인 황일순 교수가 원국행 대표를 맡았고 주한규 교수 등이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2018년 3월 말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에 우리 기술로 수출한 바라카원전의 현지 완공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오찬간담회에서 “바라카원전은 우리나라가 처음 수출한 원전”이라며 “우리는 원전 기술을 수입하는 시대에서 수출하는 시대로 발전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원전 업계에서는 ‘정부가 원전 수출에는 그나마 적극적이니 이 방향으로 발을 맞춰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졌다.
2018년 상반기 원국행은 북한에 원전을 수출하자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둘로 쪼개져 내부 구성원들끼리 한 달 넘게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당시 원국행 내에서 북한에 원전을 수출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과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파트팀장을 지낸 이병령 박사와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국장, 김창영 전 정운찬 국무총리 공보실장 등이었다. 이병령 박사는 과거 노무현 정부 때 대전 유성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었고 실제로 2000년과 2002년 구청장도 지낸 인물이다. 이 박사는 이 시점보다 1년여가 지난 2019년 10월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추천으로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으로 들어갔다. 이 박사는 과거 KEDO 사업 당시 KEDO 파트팀장을 했었다.
북한에 원전 수출 놓고 찬반 그룹으로 쪼개져
이 박사는 당시 원국행에 합류했던 이유에 대해 주간조선에 “처음에 단체가 꾸려져 들어오라길래 가서 ‘함께하자, 좋다’ 했는데 들어가 보니 탈원전 반대를 한다는데 정부 방침에 반대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다들 겁을 냈다”며 “그렇게 겁내면서 무슨 탈원전을 반대하냐, 차라리 원전을 해외 수출하는 걸로 하자고 논리를 바꿨다”고 했다.
이 박사는 북한에 원전을 지원하자고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원전은 한번 건설하면 부품과 장비 등이 매일 고장이 나고 수리가 간단하지가 않다. 설계 수준의 고급기술이 있어야 AS가 가능하다”며 “북한이 우리 전력발전량의 4% 수준이고 그나마도 전압 주파수 등이 매우 불안정해서 한국 원전을 받으면 거기서 생산되는 전기는 100% 산업용으로 쓸 텐데 그럴 경우 북한이 우리에게 섭섭한 일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고 했다. 과거 우리나라가 프랑스 등 선진국 발전소를 도입했을 때 원전이 고장날 경우 수리를 위해 프랑스 기술자가 올 때까지 7일이고 10일이고 계속 기다렸던 사례를 감안하면, 북한에 원전을 지어줄 경우 북한이 한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될 것이라는 게 이 박사의 논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