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5일 20대 대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오차범위를 넘어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달아 발표됐다. 2월 17일 조사회사 4곳(한국리서치·코리아리서치·케이스탯·엠브레인)이 함께 조사해 발표한 전국지표조사(NBS·2월 14~16일 1012명)는 윤 후보 40%, 이 후보 31%였다. 서던포스트·CBS 조사(18~19일 1001명)는 윤 후보 40.2%, 이 후보 31.4%였고, 칸타코리아·서울경제 조사(18~19일 1012명)도 윤 후보 41.3%, 이 후보 32.2%였다.
하지만 여전히 선두권의 두 후보가 박빙인 결과도 있었다. 한국갤럽·머니투데이가 지난 2월 23일 발표한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21~22일 1014명)는 윤 후보(39.0%)와 이 후보(38.3%)가 초접전이었다. 한길리서치·폴리뉴스 조사(19~21일 1027명)도 이 후보 42.6%, 윤 후보 42.7%로 0.1%포인트 차에 그쳤다.
여론조사에서 열세 또는 초접전인 여권(與圈)은 ‘샤이(shy) 이재명’에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여론조사를 회피하며 지지 성향을 드러내지 않다가 3월 9일 투표장에 나와 이재명 후보를 찍을 사람들이 많다”는 주장이다. 이 후보가 열세인 여론조사는 부정확하기 때문에 주눅들 필요가 없고 ‘샤이 이재명’이 결국 판세를 가를 ‘복병’이란 것이다.
이 후보도 지난 2월 22일 KBS라디오 인터뷰에서 대선 판세와 관련해 진행자가 “바닥 민심과 여론조사 결과가 조금 다른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여론조사 결과가 양측으로 널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조금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이해찬 민주당 전 대표는 “여론조사는 투표 결과와 차이가 있다”며 “캠프는 여론조사를 맹신하지 말고 큰 흐름과 변화를 포착하는 해석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친여(親與) 방송인 등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김어준씨는 유튜브 채널 ‘다스뵈이다’에서 “(이 후보가 불리한 결과는) 여론조사로 여론을 만들려고 하는 보수의 기획”이라고 했다. 그는 “평소 여론조사에 응하지 않는 사람이 꽤 된다”며 “샤이 이재명이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선 과거 선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열세 후보 진영의 위기감 반영’이란 해석이 있다. 과거 각종 선거에서 ‘샤이 유권자’로 인해 승부가 달라진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며 이번 대선에서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시각이다. 국내 선거에서 ‘숨은 표(票)’, 즉 ‘샤이 유권자’ 논란이 벌어진 것은 2002년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선 24일 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직후 이회창 후보(37.0%)에게 노 후보(43.5%)가 역전에 성공하자 한나라당은 “숨어 있는 지지표가 5%에 달한다”며 “이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2.3%포인트 차로 패했다. 2020년 총선에선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황교안 대표가 “숨어 있는 보수 표가 많다”고 했지만 참패했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정반대로 여권에서 ‘샤이 진보’를 주장했다. 이해찬 전 대표는 “여론조사가 가진 기술적인 방법으로 장난을 많이 친다”고 했고,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여론조사 결과와 바닥 민심은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상대로 18.3%포인트 차로 압승했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요즘 사회적 주류인 여권 지지층이 굳이 여론조사에서 지지 후보를 숨길 이유는 없다”며 “샤이 유권자가 있다고 해도 그 규모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과거에 비해 여론조사 표본에서 진보층 규모가 그다지 줄어든 게 없다”며 “진보층이 여론조사를 더 많이 회피한다는 근거는 없다”고 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과거 선거에선 ‘여론조사와 바닥 민심이 다르다’ ‘현장 분위기는 좋다’ ‘샤이 유권자가 많다’ 등 주장을 펴는 쪽이 대부분 패했다”고 했다.
하지만 ‘역대급 비호감’이란 이번 대선의 분위기에서 ‘샤이 유권자’ 표심이 전혀 설득력 없는 얘기는 아니란 지적이 있다. 2016년 미국 대선도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비호감 대결에서 여론조사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샤이 유권자’ 논란이 있었다. 또 “역대 대선 중에서 처음으로 여당 후보 지지율이 현직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보다 낮은 선거란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 이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유권자는 결국 이 후보를 찍을 ‘샤이 이재명’이란 분석이다.
대선을 앞두고 임기 말의 현직 대통령 지지율보다 여당 후보 지지율이 낮았던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선은 매우 독특한 선거다. 과거 대선에서 지지율이 저조한 여당 후보였던 2007년 대선의 정동영 후보도 갤럽의 최종 조사에서 24.4%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22.9%)보다 높았다.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과 이 후보의 지지율 차이는 대략 10%포인트다. 4개 조사회사의 NBS 조사(2월 17일 발표)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41%였지만, 이 후보 지지율은 31%였고 윤 후보는 40%였다. 한국리서치·한국일보가 지난 2월 20일 발표한 조사(18~19일 1000명)도 문 대통령 지지율은 46.8%였지만, 이 후보(36.9%)는 윤 후보(42.4%)에게 5.5%포인트 뒤졌다. 만약 ‘샤이 이재명’ 유권자가 10%가량이라면 이 후보에게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샤이 이재명’으로 인해 현재의 대선 다자(多者)구도에서는 야당 후보의 승리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윤석열·안철수 후보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이 후보를 선택할 샤이 진보층이 3~5% 정도는 있다고 봐야 한다”며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국가미래연구원에 게재한 ‘빅데이터 분석으로 본 2022년 대선’이라는 글에서 “빅데이터 분석 결과, 이재명 후보에 대한 관심도가 윤석열 후보보다 두 배 이상 많다”며 “‘샤이 이재명’이 존재할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그는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의 호남 지지율 등이 실제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다”며 “현 시점에서 약 5% 정도의 ‘샤이 이재명’ 표가 숨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여론조사에선 이 후보의 호남 지지율이 50~60%가량이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결집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대선 당일에는 이 후보에게 최소 80%의 호남표가 몰릴 것으로 보는 게 상식이란 견해다. 김 교수는 “‘샤이 이재명’은 정권교체 추구 세력에는 위험 신호”라며 “야권이 정권을 확실히 교체하려면 후보 단일화를 통한 연대가 최상의 방안”이라고 했다.(기사에 인용한 자료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