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북한군에 의해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형인 이래진(왼쪽)씨와 김기윤 변호사가 지난 5월 25일 청와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서류를 대통령기록관에 전달하기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대통령기록관이 “국가기관이 접수한 대통령실(청와대) 공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다”라고 26일 밝혔다. 청와대가 발송한 공문이라도 부처·기관이 보관하고 있다면 대통령기록물로 분류하지 않고 공개할 수 있다는 취지다. 이를 근거로 국민의힘은 2020년 9월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당시 청와대가 해양경찰청·국방부 등에 발송한 ‘지침 공문’ 전체를 요구하기로 했다.

국민의힘 ‘서해 공무원 피격 태스크포스(TF)’ 단장인 하태경 의원은 이날 “대통령실에서 발송하고 부처나 기관이 접수한 공문은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는 행안부의 유권해석이 나왔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해경, 국방부 등 국가 기관이 접수한 청와대 지침 전부는 국회가 자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해수부 공무원 피격 사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문이 열렸다”고 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대통령기록관은 하 의원에게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서 “대통령실에서 발송하여 부처가 접수한 문서는 관리 권한이 해당 기관에 있다”며 “(따라서)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고 지정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 지시 사항을 포함한 공문이 대통령기록물로 봉인됐다고 하더라도 해경·국방부가 접수한 ‘또 다른 문건’은 공개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최재희 국가기록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대통령기록물을 총괄하는 대통령기록관의 해석이기 때문에 (공개하는 데 있어)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면서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면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서 공개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된 문건은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동의가 있거나 서울고등법원장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이 있어야 열람할 수 있다. 앞서 대통령기록관도 이를 근거로 해수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씨 유족이 요구한 사망 경위 관련 자료 공개에 불응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측은 어떤 문건이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됐는지 ‘목록’조차도 봉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국방부는 “우리도 어떤 문건이 대통령기록물인지 알 수가 없다”면서 당시 청와대에서 하달된 공문 일체에 대한 공개를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유권해석으로 부처·기관을 통해서 청와대 문건에 접근할 수 있는 우회로가 열린 셈이다.

국민의힘 TF는 “당시 청와대가 관련 부처에 하달한 지시·지침 공문이 ‘월북 조작’ 여부를 밝힐 열쇠”라고 판단하고 있다. 앞서 TF는 사건 초기 국방부가 “북한이 시신까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했다가, 사흘 만에 “시신 소각이 추정된다”고 번복한 배경에는 서주석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서 전 차장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면서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다.

하태경 TF 단장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 진상조사 TF팀이 지난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피격 공무원 유족 이래진 씨를 만나 조사 중간 결과를 발표를 하고 있다. /뉴스1

‘청와대 지시·지침 공문’이 공개된다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적절한 대처를 했는지도 일정 부분 가릴 수 있다. 2020년 9월 22일 오후 6시 36분 문 전 대통령은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씨가 북한군에 의해 억류되어 있다는 서면 보고를 받았지만, 그 직후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 해경·국방부의 공통된 진술이다. 결국 이씨는 문 전 대통령이 보고받은 지 3시간 만인 같은 날 오후 9시 40분쯤 북한군에 의해 총살됐다. 당시 해경·국방부가 수신한 공문 내역을 확인해본다면 청와대가 구조 지시를 내렸는지 여부도 드러날 수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대통령기록관의 유권해석에 대해서 공식적인 입장은 내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국민의힘에서 새로운 팩트 없이 자꾸 정쟁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SI(특수정보) 공개는 못 한다고 해놓고 또 (여당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공개하라는 건 이율배반적 이야기”라며 “안보 해악을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대통령기록관 유권해석으로 청와대 지침 공문 공개의 길이 열렸지만, 실제 부처와 기관들이 문건을 공개할지는 미지수다. 문 전 대통령 측에서 “대통령기록물을 공개했다”며 해당 부처·기관에 법적 책임을 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이다. 여권 내에서는 “당시 해수부 공무원 이씨를 생환시키지 못한 책임이 있는 기관들이 쉽게 치부를 드러내겠느냐”는 시각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