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서면조사를 요청한 것을 두고 며칠간 일어난 일련의 상황은 비슷한 형태로 또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사정기관의 수사(감사) 진행→야권의 반발→대통령·여권의 원칙론적 입장→야권의 맞공세→여야 갈등’이 되풀이되는 식이다. 수사 대상이 문 전 대통령 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측근들이 되고, 수사 주체가 검찰·경찰·감사원으로 바뀔 뿐 유사한 과정에 의해 여야가 냉랭한 관계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감사원이 지난 9월 28일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과 관련해 문 전 대통령에게 서면조사를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분위기였다. 감사원은 지난 6월부터 이 사건과 관련한 최초 보고 과정,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첩보 보고서 삭제 의혹 등에 대해 감사를 진행해왔다. 해당 감사는 오는 10월 14일 마무리될 예정인데, 감사 종료를 앞두고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 실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것이 감사원의 입장이었다.
“무례한 짓” vs “겸허하게 응하라”
하지만 문 전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감사원의 서면조사 요구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이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민생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야당을 탄압하고 전 정부에 정치보복을 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윤석열정권 정치탄압대책위원회’ 박범계 위원장은 지난 10월 3일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감사원의 서면조사 통보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벌여왔던 그 모든 ‘소란’의 최종 종착지가 문 전 대통령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정권 정치탄압대책위원회’는 지난 9월 민주당 새 지도부가 출범하면서 구성된 기구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월 5일 대통령실 출근길 문답에서 이에 대해 “감사원은 헌법기관이고 대통령실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그런 기관”이라며 “대통령이 뭐라고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논란과 선을 그었다. 여권은 야당이 주장하는 ‘정치보복’ 프레임을 반박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감사원에서 서면조사 요구서를 퇴임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 첫 사례가 아니다”라며 “겸허한 마음으로 그냥 응대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과 야권의 반발이 거세지자 감사원은 지난 10월 3일 입장문을 통해 1993년 노태우 전 대통령, 1998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감사원으로부터 받은 질문서에 답변을 했고, 2017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 2018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각각 질문서를 전달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 질문서 수령을 거부한 적이 있다고 알린 바 있다. 다만 감사원은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난 10월 4일 밝혔다.
지난 10월 5일에는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이관섭 대통령비서실 국정기획수석에게 “오늘 또 제대로 해명자료가 나갈 겁니다. 무식한 소리 말라는 취지입니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이 포착돼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날 유 사무총장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감사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한겨레 보도에 대한 해명자료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됐다.
‘전쟁이다’ vs ‘범죄수사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감사원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유 사무총장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함께 윤석열 정권의 ‘사정(司正) 정국’을 이끄는 2인방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최근 감사원의 감사를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유 사무총장에겐 감사원 2인자를 넘어 ‘정권 실세’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헌법상 독립기관인 감사원의 사무총장이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에게 업무보고 형식의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자 야당은 즉각 맹공을 가했다. 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 감사의 배후가 대통령실로 드러났다”며 “두 사람의 문자는 감사원 감사가 대통령실 지시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 감사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은 “감사원 업무에 관해서는 (대통령실이) 관여하는 것은 법에도 안 맞고 그런 무리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 9월 1일 검찰이 이재명 대표에게 소환을 통보했을 때도 유사한 흐름이었다. 민주당에선 ‘전쟁’이란 반응이 나왔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전쟁이 아닌 범죄 수사”라고 반박했다. 당시 후보자 신분이었던 이원석 검찰총장은 “서면답변 제출을 요청했는데 기한이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설명 기회를 드리고자 소환 요청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표는 검찰 소환에 불응했고, 민주당은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특검법을 당론으로 결의해 발의하며 맞섰다.
‘원칙적인 수사(감사)’라는 쪽과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는 여야 갈등은 이같이 하나의 패턴처럼 반복되어 왔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수사가 벌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윤석열 정권은 여소야대의 국회 지형에서 취임 초기 지지율이 20%대까지 하락했다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서 여권의 딜레마가 생긴다.
“왜 뽑아줬는지 되새겨야 한다”
지난 7월 말 윤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취임 두 달여 만에 20%대까지 곤두박질쳤을 때, 보수 성향의 한 정치평론가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국민들이 왜 윤석열을 뽑아줬는지 되새겨야 한다. 경제를 일으키고 정치를 능숙하게 잘할 것 같아서 표를 줬을까? 아니다.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진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들에 대해 엄정하게 심판하라고 지지한 것이다. 윤석열도 대선 기간 내내 ‘공정과 법치’를 내세우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까지 뭔가 하나 제대로 나온 게 없으니 지지층들도 실망해서 이런 수치가 나온 거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보면 최근 검경과 감사원 등에 의해 사정 정국이 펼쳐지는 흐름은 윤 대통령의 지지층을 만족시킬 수 있다. 불법과 부정부패가 벌어졌다면 이를 밝혀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원칙론도 설득력 있다. 다만 거대 야당의 반발이라는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현직 대통령의 취임 초반 지지도가 전임 대통령의 퇴임 시기보다 낮다는 현실도 만만치 않은 험로를 예상케 한다. 이 지점부터는 사법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다. 야권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힘은 검찰 수사의 정교함이 아닌 여론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잠시 반등하던 국정 지지도가 다시 20%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엠브레인퍼블릭, 케이스탯리서치, 코리아리서치, 한국리서치가 지난 10월 3〜5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직전 조사인 2주 전보다 3%포인트 하락한 29%였다. 부정 평가는 5%포인트 상승해 65%였다. 부정평가 이유로는 ‘경험과 능력이 부족해서’(36%), ‘독단적이고 일방적이어서’(34%) 등이 꼽혔다.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비속어 논란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해석됐다.
통상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다녀오면 잠시나마 지지율이 반등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이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에 민간인이 동행해 김건희 여사를 수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바 있다. 윤 대통령의 지지도는 이 논란 이후부터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준석 전 대표와 윤핵관 의원들 사이의 갈등, 윤 대통령의 ‘내부총질’ 문자 포착 등이 이어졌다.
물론 윤 대통령은 국정 지지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매주 업데이트되는 ‘수치’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20%대까지 내려앉은 지지도는 금방 회복시킬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여권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윤 대통령에게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굳혀지는 상황이다.
인기 없는 정권의 수사 딜레마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 있는 여권 인사의 말이다. “인기 있는 정권에서 벌어지는 수사는 사필귀정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인기 없는 정권이 벌이면 무리한 정치보복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일 때, 당시 여권 내에서도 ‘자제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노 전 대통령 일가의 혐의는 분명해 보였지만 수사를 강도 높게 진행할수록 따르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 보였기 때문이다.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에 맞춰 불구속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검찰과 청와대 안팎으로 전달됐지만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인사는 “윤 대통령이 검사 출신인 만큼 엄정한 법 집행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도 분명히 있다. 다만 문재인·이재명이 사법처리된다고 해서 윤 대통령 인기가 오를까. 이건 다른 문제다”라며 “오히려 야권에 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억압받는다는 ‘피해자 서사’만 안겨줄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바로 그 피해자 서사로 대통령이 된 사람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지점에 대한 고민은 여당 내에서도 공유되고 있는 분위기다. 주간조선이 접촉한 국민의힘 대다수 의원들의 반응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귀결됐다. ‘야권에선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렇다고 드러난 불법을 덮을 수도 없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국민의힘 한 초선의원은 “지금 진행 중인 사안들은 대부분 정권교체가 되기 이전부터 의혹이 제기된 것들이다. 이걸 밝혀내는 건 당연한 순리”라면서 “수사기관들도 망신주기식 수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정치보복이라는 야당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국민의힘의 한 전직 중진 의원은 “대통령이 진행 중인 수사에 대해 개입할 수는 없지만, 사정기관들도 기본적으로 정권의 분위기를 봐가면서 움직이지 않겠나”라면서 “사정기관에 ‘이렇게 해도 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면 자칫 무리수를 두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강대강’은 2024년에야 끝난다
지금 같은 강대강의 대립 구도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현재로선 협치나 화합을 기대할 수 있는 마땅한 계기가 없어 보인다. 정치권에선 여야의 극한 대립이 ‘화해’가 아닌 ‘승부’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2024년 22대 총선이 그 승부처라는 것이다. 22대 총선까지는 아직 1년6개월이 남았다. 한국 정치권에서 1년6개월 이후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여야가 더욱 눈앞의 정쟁에만 몰두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의 한 인사는 “사실 대선 직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민주당은 0.73%포인트의 득표율 격차만 강조하고 나왔고, 윤 대통령에겐 허니문 기간이 아예 없었다”면서 “민주당은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의 충격을 만회하기 위해, 국민의힘은 소수 여당으로 살아남기 위해 강성 지지층 여론에 기대기 시작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