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에 있는 백범 김구 묘역에서 열린 김구 선생 71주기 추모식에서 참배하는 태영호 의원. photo 뉴시스

국민의힘 최고위원인 태영호 의원의 백범 김구 관련 발언의 파장이 적지 않다. 태영호 의원은 최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KBS ‘역사저널 그날’ 프로그램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 선생은 마지막까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됐다는 식으로 역사를 다룬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북한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걸 봤을 때 김구 선생이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지만, 북한의 대남 전략전술을 아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김구 선생이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태 의원의 이 같은 발언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내에서도 지난 전당대회 때 최고위원 자리를 두고 태 의원과 경쟁했던 허은아 의원(비례), 김용태 전 최고위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태 의원의 발언을 ‘망언’ ‘설화’로 규정하고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이에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윤재옥 원내대표가 차례로 태 의원과 만나 ‘대외활동 자제’를 당부하는 등 사태수습에 급급한 모습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둔 지난 2월 태영호 의원이 제주를 찾아 “제주 4·3사건이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됐다”는 발언을 했을 때,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태 의원에게 ‘발언자제’를 촉구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김구, 수령님 접견 후 련공합작의 길’

실제로 북한 당국이 펴낸 공식 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은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기술하면서 태 의원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다루었던 것과 거의 흡사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김구를 기술하면서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싸우게 되자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이 김구를 암살했다”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949년 김구를 암살한 것은 육군 소위 안두희지만, 암살동기와 그 배후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아울러 북한 당국의 공식 역사기록에 따르면, “김구가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했다”는 태 의원의 지적처럼 해석될 여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대백과사전은 김구에 대해 “반일독립운동을 주로 테로(테러)의 방법에 의거하여 진행하려 하였다” “8·15 후 남조선에 돌아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하면서 반(反)민주주의의 길로 나갔다”고 부정적으로 서술했지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초청을 받고 주체 37년(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련석(연석)회의에 참가하였으며 경애하는 수령님(김일성)의 접견을 받은 후부터는 완전히 련공(연공)합작의 길에 나섰다”고 긍정평가했다. 1948년 방북해 김일성과 만난 시점을 전후로 김구에 대한 평가가 180도 뒤바뀐 것이다.

아울러 조선대백과사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정령에 의하여 주체 79년(1990년) 8월 15일 그(김구)에게 ‘조국통일상’이 수여되었다”고 적고 있다. 주체 79년은 1990년으로,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이 후계자의 지위를 사실상 굳히고, ‘당중앙’의 이름으로 실권을 휘두를 때였다. ‘반공(反共) 우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구에게 사후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면서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승만, 친미매국역적·괴뢰대통령’

반면 북한 당국은 김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이승만을 ‘친미매국역적, 초대 남조선괴뢰대통령’으로 규정한 조선대백과사전은 “1919년 3·1운동 후 미국에서 조직되었던 ‘한성림시(임시)정부’와 상해(상하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에서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되었다가 ‘림정(임정)’의 배척을 받고 사임하였으며,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친미반공분자’로 전락되었다” “1945년 10월 미군정의 앞잡이로 서울에 들어왔으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국회의장 등을 거쳐 1948년 8월 남조선 괴뢰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미제의 적극적인 비호 밑에 온갖 사기협잡으로 1951년(실제는 1952년) 제2대, 1956년 제3대, 1960년 제4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며 “집권기간 ‘북진통일’을 떠벌이면서 미제의 사촉(사주) 밑에 1950년 6월 25일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으며 남조선을 미제의 완전한 식민지 군사기지로, 인간생지옥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과 거짓을 섞은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4대 대통령은 윤보선이었고, 6·25전쟁이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사전허가를 구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은 구소련과 중국의 공식문건 등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는 “1960년 4월 인민봉기(4·19혁명)에 의하여 괴뢰정부가 붕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쫓겨갔다가 죽었다”고 서술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서술로 일관한 셈이다. 김구를 기술하면서 사진을 넣어준 데 반해, 이승만을 기술한 대목에서는 사진조차 넣어주지 않은 점도 상당히 눈길을 끈다.

‘상해임정, 테러행위로 김일성 방해’

다만 김구에 대한 평가 역시 북한 당국의 입맛에 따라 지극히 자의적으로 이뤄지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같은 점은 이승만과 김구가 각각 초대 대통령과 초대 주석으로 이끌었던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혹평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상해임시정부’를 기술하면서 “임시정부는 그 어떤 대중적 지반(기반)도 못 가진 정부였으며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한 망명집단이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 헌법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는 것과 180도 상반된 평가다.

아울러 조선대백과사전은 “림시정부 우두머리들은 애국동포들로부터 ‘운동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금품을 모아 사욕을 채웠으며 인두세의 징수, 사령장 발급, 공채발행 등으로 돈을 긁어모아 부패타락한 생활에 탕진하였다”며 “‘반공’사상에 물 젖은 이 집단은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면서 그들에 대한 테로(테러)행위를 서슴없이 강행하였으며 특히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조직령도(영도)하시는 영웅적 항일무장투쟁을 방해하였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임시정부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의 지도하에 이뤄진 항일무장투쟁 중 장제스 전 총통으로부터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1932년 4월)는 쏙 빼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이봉창 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몬 의거(1932년 1월)만 기술한 것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심지어 북한 당국은 이봉창 의사의 도쿄 의거마저 “혁명조직과 연계 없이 진행된 그의 개인 테러행위는 실패를 면할 수 없었다”며 김구와 상관없는 ‘개인 테러’로 평가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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