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5월 1일 경기도 포천과 연천 접경의 주한미군 세인트바바라사격장(현 육군 다락대훈련장)에서 열린 어니스트 존 미사일과 M65 원자포 시범발사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photo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1958년 5월 1일 경기도 포천과 연천 접경에 있는 주한미군 세인트바바라사격장(현 육군 다락대훈련장). 이날 오전 10시45분경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어니스트 존 지대지 미사일이 발사됐다. 이어 주한미군 병사 13명이 낑낑거리며 돌려세운 280㎜ M65 원자포 역시 포신에서 화염과 연기를 내뿜으면서 포탄을 임진강 쪽으로 날려보냈다.

이날 세인트바바라사격장에서 어니스트 존 미사일과 M65 원자포 발사시범을 지켜본 사람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조지 데커 유엔군 및 초대 주한미군 사령관을 비롯해 이기붕 민의원(하원) 의장, 김정렬 국방부 장관, 사단장급 이상 한·미 고급 장성 100여명. 이날 VIP 참관석에서 홀로 비스듬히 몸을 기대 미사일과 포탄이 임진강 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이 대통령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날 시범발사 소식을 전한 ‘대한늬우스’(뉴스)는 “휴전선 남방 8마일 지점에 위치한 미 제1군단 세인트바바라사격장에서 어니스트 존 로켓포(미사일)와 280㎜ 원자포, 8인치 곡사포 시범발사가 진행됐다”며 “최초의 시범발사는 병사 13명에 의해 조종된 전기장치의 어니스트 존이 오전 10시45분을 기해 발사됐고 200파운드 무게를 가진 포탄이 10마일(약 16㎞) 떨어진 임진강 쪽 고지에 낙하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 처음 들여온 주한미군 전술핵 발사체를 최초 공개한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진행된 이날 시범발사는 휴전선 주변 환경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지축을 뒤흔드는 원자포의 굉음에 놀란 북한의 김일성은 1960년대부터 휴전선 이북 전 지역에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땅굴을 파서 주요 군사시설과 산업시설을 지하에 은닉하는 대대적 공사였다. 김일성이 주창한 이른바 ‘4대 군사노선’ 중 하나인 ‘전 지역의 요새화’의 신호탄을 원자포가 쏘아 올린 것이다. 이재봉 원광대 명예교수(미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가 쓴 ‘남한의 핵무기 도입과 미국’이란 논문에 따르면, 김일성은 “원자탄을 갖지 않고도 원자탄을 가진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며 지하갱도 굴착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 인민군 주력 부대 역시 휴전선 코앞으로 전진배치됐다. 주한미군과 한국군이 전술핵을 쓸 수 없도록 적을 끌어안고 함께 죽는 이른바 ‘논개 작전’에 나선 것. 이재봉 교수는 “휴전선 근처에 전진 배치된 북한군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남한의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과 남한군은 물론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방사능 피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으로부터 받아낸 전술핵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일성의 제2한국전 도발을 막는 강력한 억지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1958년 5월 1일 경기도 포천과 연천 접경의 주한미군 세인트바바라사격장(현 육군 다락대훈련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첫 발사된 어니스트 존 미사일과 280㎜ M65 원자포(아래). photo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미 ‘워싱턴선언’ 엇갈리는 반응

최근 한·미 양국 정상이 공동발표한 ‘워싱턴선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지난 4월 24일부터 5박7일 일정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갖고 ‘워싱턴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워싱턴선언은 한·미 간 차관보급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고, 핵미사일을 탑재한 전략핵잠수함(SSBN)을 한반도 주변 해역에 정례적으로 전개하고 기항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워싱턴선언’ 발표 직후 “사실상 미국과 핵공유”(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사실상 전술핵 재배치”(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같은 긍정적 평가도 나오지만 아쉽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국내 보수층 일각에서 학수고대해 온 ‘주한미군 전술핵 재배치’ ‘최소 핵물질 확보 동의’ 등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실물이 없다는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미국의 정치상황 변화는 물론 한국의 정치상황 변화에 따라 미국의 확장억제가 실제 상황에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는 지적도 나온다. 이른바 “현찰 대신 백지수표만 받아왔다”는 비판이다.

특히 ‘워싱턴선언’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한·미 원자력협정’ 준수를 재차 다짐한 데 대한 비판도 나온다. 점증하는 북핵 위협에 따라 미국의 일부 전문가(대릴 프레스 미 다트머스대 국제안보연구소장)들조차 한국이 NPT 제10조에서 명시한 ‘탈퇴조건’을 충족한 것으로 간주해 왔다. NPT 제10조는 “모든 체결국은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지대한 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을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워싱턴선언’을 통해 NPT 준수를 다짐하고 핵물질 확보에 필요한 ‘재처리’를 금지한 ‘한·미 원자력 협정’ 준수도 재차 다짐하면서 자체 핵개발 가능성은 묶고 대미 핵의존도만 더욱 높여놨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도 최근 미국 현지 언론에 쓴 기고문에서 “바이든의 대응은 한국의 우려를 완화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워싱턴선언의 수사는 단지 말로만 그칠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민주당, “이승만ㆍ박정희가 실망”

심지어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인 김민석 의원은 지난 4월 27일 “미국의 말만 믿지 않고 자주국방을 시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미국과 동맹을 하면서도 때로는 벼랑끝 전술을 추구하면서 대일 독자성을 지키고 일본을 견제해왔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금 돌아온다면 매우 실망했을 가성비 낮은 저자세 외교였다”고 혹평했다.

민주당의 이 같은 논평은 지난 문재인 정권 때 핵물질 확보에 필수적인 월성 1호기(중수로)를 영구정지시키고,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언급조차 금기시해왔던 것에 비추어 봤을 때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2차대전 후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미동맹(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이듬해인 1954년 7월 한국 대통령 최초로 미국을 국빈방문해 유창한 영어로 미 상하원 합동연설을 했다. 이어 1958년을 전후로 미국의 전술핵 발사체를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전술핵이 1958년 한국에 최초로 반입됐다는 사실은 일부 전공 학자들 외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그간 기밀해제된 미 백악관과 국무부 문건 등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1957년 12월에서 1958년 1월 사이에 핵을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5월 1일 이승만 대통령 임석하에 어니스트 존 미사일과 M65 원자포 시범발사가 이뤄지기 석 달 전인 같은해 2월 3일, 경기도 의정부의 캠프 라과디아 비행장에서는 이임을 앞둔 아서 트뤼도 미 제1군단장(중장) 주재로 어니스트 존 미사일과 M65 원자포에 대한 열병식이 열렸다.

아서 트뤼도 미 제1군단장 주재로 열린 이날 열병식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열병식 소식을 전한 ‘대한늬우스’는 “280㎜ 원자포의 웅장한 모습은 침략군을 일시에 섬멸할 위력을 자랑했다”고 전했다. 적어도 1958년 2월 전에는 전술핵을 발사할 수 있는 발사체가 국내에 반입됐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전술핵 발사체와 함께 핵탄두까지 함께 들여왔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50년대에 전술핵이 배치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전협정 위반 소지가 있어 미국 측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해왔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1974년 무렵으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자체 핵무장 계획을 밝힌 이후부터다.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있던 미국 정부는 1971년 주한미군 제7사단(병력 2만명)을 한국에서 철수하는 등 한국에서 발을 빼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미국이 ‘남베트남’을 버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박정희 정부는 1974년 프랑스와 ‘한·불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자체 핵무장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깜짝 놀란 미국이 전술핵 배치 사실을 공개하면서 ‘핵포기’를 압박한 것이다.

다만 주한미군이 정확히 언제부터, 무슨 기종의 핵무기를, 몇 기나 어디에 배치했었는지는 그때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후 기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건을 통해 늦어도 1958년 1월경에는 경기도 의정부와 안양 일대에 전술핵이 최초 배치됐고, 1991년 철수하기 전까지 최대 1000기 가까이 배치됐다고만 알려졌을 뿐이다. 한·미 양국 정부 모두 주한미군의 전술핵 관련 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한 바는 없다.

지난 4월 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서 미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photo 뉴시스

전술핵 받아낸 이승만의 ‘벼랑끝 전술’

그나마 그간의 연구가 축적돼 밝혀진 것은 1958년 전술핵 반입에 미국을 상대로 한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끝 전술(Brinkmanship)’이 주효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눈엣가시’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 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 중장과 이승만 대통령은 줄곧 불편한 관계였다. 6·25전쟁 와중인 1952년에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계획인 ‘에버레디 계획(Plan Eveready)’이 미국에 의해 추진되기도 했다. ‘북진통일’만을 고집한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부터 ‘출구전략’을 모색해 온 미국에 결정적 걸림돌이었다.

1953년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정전협정 체결을 거부한 이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에도 강력 저항했다. 당시 이미 80세에 가까운 노(老)대통령은 미국을 향해 ‘주한미군을 감축하려면 그를 상쇄할 현대식 무기를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 측으로서는 이승만 대통령 유고(有故) 시 혈기왕성한 40대 초반의 김일성(1912년생)이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재차 남침해올 염려도 있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와 전후 사정들이 맞아떨어지면서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전술핵 배치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재봉 교수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한 까닭은 구형 핵무기 재고처리 등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1958년 한국에 모습을 드러낸 M65 원자포는 길이 26m, 구경 280㎜, 무게 866t의 거포(巨砲)로 두 대의 트럭이 앞뒤로 끌어야 할 정도로 취급하기 힘들었다. 1958년 당시 공개 영상을 보면 M65 원자포의 포신을 돌리기 위해 건장한 병사 13명이 달라붙어 낑낑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M65 원자포의 사정거리도 28㎞에 불과해 유럽이나 대만에 배치할 경우 소련과 중국을 타격하기가 불가능했다. 반대로 작전 종심(縱深)이 짧은 한반도는 휴전선 인근에 배치해 북한군을 묶어두기에 적합했다.

이 같은 제반 사정을 감안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7년경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7년 6월 21일에 월터 다울링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리먼 렘니처 유엔군 사령관을 통해 “주한미군을 현대무기(Modern Weapons)로 무장하기로 결정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극비문건을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흘 뒤인 6월 24일 아이젠하워 앞으로 “현대무기를 보내기로 한 데 감사한다”는 내용의 답서를 전달했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 사이에 오간 친서들은 행안부 대통령기록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전술핵을 국내로 들여오기에 앞서 자체 핵개발도 병행했다. 1953년 유엔 총회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을 천명한 이듬해인 1954년에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이 체결됐다. 이어 1956년에는 문교부 기술교육국 안에 원자력과를 신설했고, 1959년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도 설립했다. 지금도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호인 ‘우남(雩南)’을 딴 ‘우남홀’이란 대강당이 있다.

바이든, “한반도에 핵 재배치 안 해”

하지만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어렵게 들여온 전술핵을 1991년 9월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철수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해 11월과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한반도 핵부재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92년 1월에는 남북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체결했다.

그 이후 북한은 김정일 집권 때인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김정은 집권 때인 2017년 9월 6차 핵실험까지 모두 6차례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사실상 핵보유국이 됐다.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으로 남북한이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휴짓조각이 된 지 오래다.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로 한반도에서는 쌍방이 핵을 가지면서 역설적으로 전쟁을 억지하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 사실상 무너진 상태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워싱턴선언’을 공동 발표하면서 “북한의 핵공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도 “한반도에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선을 그었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61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드골이 던진 질문은 ‘워싱턴선언’ 이후에도 한국에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LA를 희생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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