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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牛山) 정해창(丁海昌·85) 선생은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표상(表象)으로 불린다. 대학 3학년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에 합격하고 군 복무후 1962년 검사로 임관한 그는 대검찰청 차장, 법무부 차관·장관 등으로 일했다. 1993년 2월 퇴임 때까지 31년 넘게 관직에 있으면서 처신(處身)과 업무 수행, 대인 관계, 도덕성에서 그는 ‘타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흠결이나 과(過)를 지적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은퇴 이후 지금까지 30년 동안에도 그는 사리(私利) 보다 공익(公益)을 우선했다. 법조계의 전관예우(前官禮遇) 관행을 거절했고 고액 연봉을 주는 대형 로펌엔 얼씬도 않았다. 대신 1994년 한국범죄방지재단을 세워 2014년까지 이끌었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사상을 연구·선양하는 다산학술문화재단을 24년간 책임졌다. 그는 두 단체의 무보수(無報酬) 명예직 이사장이었다.
◇공직자들의 ‘표상’...퇴임후 무보수 이사장
그런 그가 지난달 <대통령 비서실장 791일>이라는 회고록을 냈다. ‘정해창의 청와대 일지’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다. 그는 1990년 12월 27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 노태우 대통령 후반부 비서실장으로 봉직했다. 835쪽 분량의 책은 대한민국 최고 권부(權府)인 청와대의 당시 국정 운영 과정과 실상을 각주(脚註)를 곁들여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2023년 10월 10일 낮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개인 사무실인 ‘우산흠흠재(牛山欽欽齋)’에서 2시간 정도 그를 인터뷰했다. 우리나라 역대 청와대 비서실장 중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회고록을 낸 그의 경륜(經綸)과 안목(眼目)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모색해 보려는 취지에서였다.
-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인데,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2014년 말 착수해 1차 초고를 완성하는 데만 7년 3개월 소요됐다. 원고지로 내가 쓴 다음 도움을 빌려 컴퓨터로 옮겼다. 다행히 비서실장 시절 업무 수행상 일일이 메모해둔 8권의 업무 일지(日誌)가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이를 토대로 연설문집, 발간자료, 당시 언론기사 등을 대조·확인하며 작업했다.”
그는 “주중에 틈틈이 집필했고 거의 매주 토요일 사무실에 나와 회고록을 썼다”며 “기억력에만 의존할 수 없어 접근 가능한 자료를 찾아 사실(事實)을 확정·기록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고 했다.
- 애써서 회고록을 낸 목적은 무엇인가?
“대통령의 국정(國政) 수행 행위는 역사적 기록과 평가의 대상이나, 비서실장으로서의 보좌(補佐) 역할도 역사적 자료라는 심정으로 나는 일했다. 훗날 바른 역사 평가의 자료가 되는 비망록(備忘錄)으로 만들어 남기고 싶었다. 당시에 참여했던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를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따라 진솔하게 기록해 두는 게 뒷날을 위해서도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 판단했다.”
◇“‘즉사이진’과 ‘필사즉생’ 각오로 임했다”
- 공직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마감했다. 당시 맡을 때 각오가 어땠나?
“‘이 중차대한 역사(役事)에 성심(誠心)을 다하자, 한시도 역사(歷史)에 책임진다는 생각을 잊지 말자’고 거듭 다짐하면서 일했다. 그 전까지 검찰·법무 분야 공직에서만 일했던 나로선 청와대 비서실장 근무가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진실한 마음으로 그 일에 합당하게 대처하고 처리하는 즉사이진(卽事而眞)의 자세만 지키면 걱정할 것 없다’는 어느 큰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필사즉생(必死卽生·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의 각오로 임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다짐하면서 실천하려 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정해창’은 사라진다는 생각, 이름 석 자를 지우고 일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비서(祕書)라는 두 글자는 눈에 뜨이지 않게 주인을 보좌하라는 뜻을 함축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셋째 ‘청와대에 가더니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처신하려 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교만(驕慢)해졌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교만은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지름길이다. 공직자는 모름지기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통령, 重責 수행한다는 겸손한 자세 바람직”
- 2년 넘게 대통령을 지근(至近)거리에서 보좌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어떤 자리인가?
“한국의 대통령은 대권(大權)이라는 말에 걸맞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을 맡는 입장에서는 ‘대권’ 보다는 ‘대임(大任)’이라는 생각을 갖는 게 올바른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 권력을 휘두른다는 생각으로 직무에 임하면 곧바로 교만에 빠져 국민적 저항의 도화선이자, 빌미가 된다. 오히려 임대책중(任大責重)한 자리를 맡아 무거운 책임을 수행한다는 겸손(謙遜)한 자세가 바람직하다.”
- 대통령 비서실장 직의 요체(要諦)는 무엇인가?
“대통령의 책임이 막중한 만큼, 비서실장의 어깨도 매우 무겁다. 직무 범위가 국정 전반에 걸쳐 있어 비서실장은 언제나 기쁨과 걱정을 함께 한다. 오전 7시 전후에 공식 업무를 시작하는, 매우 바쁘면서 사적(私的) 시간이 전혀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만큼, 비서실장은 처신(處身)에 주의 또 주의해야 하고 균형과 조화, 중용을 체득·실천해야 한다.”
그는 “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 간, 부처 간, 당정(黨政)간 등의 이견(異見)을 잘 조정해 온당한 결론을 내리고 이를 진행하는데 진력(盡力)해야 한다”며 “비서실장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으로 중용(中庸)의 길을 터득,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한 ‘791일’을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러나 매우 보람있는 나날’이었다고 말하겠다. ‘더 베스트 앤 더 브라이티스트(the best and the brightest)’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출신과 배경을 가리지 않고 한국 최고의 인재들을 당시 수석비서관과 일반 비서관으로 기용했다. 크게 문제된 사람이 전혀 기억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 비서실장으로 일하기 좋았다.”
-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에 대한 세평(世評)이 그다지 높지 않다. 특히 어떤 부분이 아쉽나?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다. 6공화국은 권위주의 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전이(轉移) 또는 이행(移行)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큰 사회적 비용이나 희생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그 사실이 너무 도외시되고 있다. 퇴임 당시 ‘북방 정책과 민주화는 잘 했으나 경제는 낙제라’는 평판이 나돌었다. 경제 분야 업적도 너무 과소평가됐다.”
◇“6共 과소평가돼...창의적인 북방 외교”
- 6공화국 국정 운영에서 가장 창의적이거나 돋보인 정책이라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그해 7·7선언으로 시동을 건 북방 외교이다. 이를 통해 5년간 45개국과 새로 수교해 우리의 외교·경제영토를 크게 넓혔다. 8차례 남북한 총리 회담을 개최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을 채택해 5년동안 북한의 도발이 한 건도 없었다. 국방개혁 추진과 1992년 10월 평시(平時)작전지휘권 환수계획 타결, 1991년 7월 용산미군기지 이전 계획 한미(韓美) 양국 합의도 이뤄냈다. 6공화국은 자주 국방과 민족 자존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경기도 분당·일산 등 신도시 건설로 200만호 주택을 지어 부동산 가격을 하향안정시켰고, 대통령 비서실내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 주도로 KTX,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추진했다. 안정된 노사(勞使) 관계를 바탕으로 대통령 주재 제조업경쟁력 강화 회의를 8차례 개최해 우리나라 제조업 경쟁력을 세계 3~5위 수준으로 높이는 기틀을 마련했다. 6공 때부터 우리나라에 중산층(中産層)이 본격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 이런 성취를 이룬 노태우 대통령의 진면목(眞面目)은 어땠나?
“분명한 것은 노태우(盧泰愚·1932~2021년) 대통령이 ‘가장 잘 준비된 지적(知的)인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1981년 7월 육군 대장 전역 전까지 공수단장, 수도방위사령관, 국군 보안사령관 등으로 근무했다. 민간에선 남북한 고위급 회담 수석대표, 정무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국회의원, 민정당 대표 등을 맡았다.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기 위해 그가 일생을 준비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깊고 넓게 생각하며 치밀했던 노태우 대통령
그는 “노태우 대통령 말고 역대 대통령 어느 누구도 당과 국회 그리고 정부에서 당대표, 국회의원, 장관직의 경력을 고루 쌓은 분이 없다. ‘준비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꼭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 ‘물태우’라는 조롱성 별명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참고 관대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그는 성품이 퍽 인자하여 대인(對人) 관계에서 베풀기를 실천하며 배려와 양보가 몸에 밴 분이었다. 2년 넘게 모시는 동안 큰 소리로 나무라는 일을 겪어 보지 않았다. 늘 조용조용 알아듣도록 지시해 스스로 따르도록 하는 지휘 방법을 실천했다. 그러면서도 순리(順理)에 따라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유연성(柔軟性)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상대의 말을 경청(傾聽)하고, 특히 전문가나 소관 참모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로 집무에 임했다.”
- 그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리더였다는 말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는 매사(每事)에 매우 신중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깊고 넓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대단히 치밀했다. 모시는 입장에서 심중(心中)을 헤아리기 쉽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은 급하게 해답을 내지 않고 이모저모 정보를 수집·파악해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내려 많은 애를 썼다. 노 대통령 특유의 부드러운 대처 덕분에 민주화 연착륙은 물론 김영삼 정부 출범이란 정권 재창출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이 부드럽다고 해도 혼란을 방치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경우 몇 가지 강경한 결단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분을 대통령으로 가진 것은 우리나라로서 다행이었고, 대통령 비서실에게도 축복(祝福)이었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라는 낮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국민 직선(直選)제로 뽑힌 대통령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이다. 그때 함께 출마한 김영삼(28%) 후보와 김대중 후보(27%)의 득표율을 합한 것(55%) 보다 20% 포인트 가까이 낮았다. 하지만 그가 5년 대통령 임기를 마치기 20일쯤 전인 1993년 2월 3~4일 미디어리서치가 진행한 ‘지난 5년간 통치 평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6.8%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같은 달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잘했다’는 평가가 41%였다.
◇경청과 유연한 자세...외부엔 援軍 둬
- 집권 초 인기 없었던 노태우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여럿 있지만 용인술(用人術)과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예로 그는 자기가 모르는 사람을 장관 등 요직(要職)에 많이 기용했다. 장관들 가운데 ‘대통령과 인연이 전혀 없는데 내가 왜 발탁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러 군데에서 대통령이 직접 천거(薦擧)받아 검증을 거쳐 임명한 것이다. 당시에는 국회에서 장관 인사 청문회 제도가 없었다. 그렇게 임명된 장관들이 모두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노 대통령은 청와대 바깥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려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참모진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즉 참모들에게 하던 일만 시키지 않고 누구를 만나 얘기를 듣고 오라는 식의 구체적인 미션을 줬다. 그래서 전문가와 원로, 석학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다. 이는 자기를 돕는 원군(援軍)들을 사회 각계에 심고 그 세력을 키우는 효과를 낳았다.”
- 1990년 1월에 ‘3당 합당’을 하지 않았나?
“그렇다. 잘 아는 대로 1988년 2월 제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은 125석을 얻어 과반수에 25석 미달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깨기 위해 보수 정당 간 연합에 나서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간의 3당 합당을 선언했다. 이로써 개헌선(200석)을 확실히 초과한 의석을 가진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수 있었다.”
-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의 눈으로 현 정부의 국정 수행을 평가해달라. 혹시 부족한 게 있다면?
“국회를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불리한 상태에서 나름 선전(善戰)하고 있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弘報)가 약한 게 아쉽다. 좌파는 선전선동을 가장 중시해 심리전·문화전에 능하며, 홍보와 여론 조작에 총력을 쏟는다. 6공화국 때에도 홍보수석을 불러놓고 ‘홍보를 잘 하라’고 여러번 야단쳤다. 노태우 대통령은 장교시절 미군 심리전 교육과정을 수료해 그 분야에 밝고 관심도 많았다. 지금 정부가 성공하려면 홍보와 여론 대응을 더 전략적으로, 더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공천 가장 중요해...옳아도 友軍 적으면 패배”
- 내년 4월 총선을 6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윤석열 정부에 조언한다면?
“2024년 4월 총선은 윤석열 정권의 승패(勝敗)를 넘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그에 실패해 전체주의 체제로 가는 길이 열리느냐를 결정하는 나라의 운명(運命)을 쥔 선거이다. 우파로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정치에서, 선거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우군(友軍)이 많아야 한다. 아무리 똑똑하고 옳아도, 우군이 없거나 그 숫자가 적으면 패배한다. 완전히 반대되지 않는다면, 정치적 입장이 조금 다른 사람들도 끌어안고 포용해 우리 편을 많이 늘려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 더 조언한다면 무엇보다 공천(公薦)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나눠 먹기식(式)이나 찍어 누르기식 공천을 한다면 전멸(全滅)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똑똑한데…”라고 했다.
- 6공화국때 탈(脫)냉전이 시작됐으나 지금은 30년 만에 한·미·일(韓美日) 대(對) 북한·중국·러시아 간의 신냉전이 펼쳐지고 있다. 나라의 생존과 관련해 말씀해 달라.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 존중이라는 세 가지 축 위에서 성장·발전해왔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거나 도와서는 안 되며 간첩과 종북(從北) 세력에 엄정한 법 집행을 해야 한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한 종북 세력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치권에 진입하고 청와대나 국가정보기관에 진출해 좌경화가 깊어졌다. 이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지금도 북한은 한반도 적화(赤化)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銘心) 또 명심해야 한다.”
◇“北위협 확실 대처하고 초격차 기술 키워야”
- 향후 5~10년 동안 국정(國政)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북한의 핵 공격을 비롯한 직·간접 침략에 확실히 대처하는 일과 획기적인 변화가 진행 중인 첨단 신기술 경쟁에서 낙후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초격차 기술 확보와 유지를 위해 과감한 기술 인력 우대 조치와 경쟁국들에 버금가는 정부 차원의 지원·육성 노력이 절실하다.”
- 공직자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인가?
“공평과 청렴, 화합과 연마를 강조하고 싶다. 이 중 으뜸은 공평무사(公平無私)이다. 중국의 고전 ‘한비자(韓非子)’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私라 하고, 公은 私와 상반되는 활동이다”고 했다. 공직은 사회적·국가적으로 공익과 질서를 위한 일을 하는 자리이다. 공직을 맡은 이상 ‘사리(私利)’를 단호하게 버리고 ‘공’을 취해야 한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공직자가 청렴해야만 공평무사할 수 있고, 그의 말에 국민이 승복한다. 공직자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처신으로 주견(主見)을 세우돼 화합하는 군자(君子)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어제의 지식이 오늘 무용지물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이를 ‘옵솔리지(obsolete+knowledge=obsoledge)라고 표현했다. 공직자가 변화에 둔감하면 나라가 망한다. 공직자는 스스로 시간을 만들어라도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며 쉼없이 연마(硏磨)해야 한다.”
- 21세에 고등고시 양과(兩科)에 합격하고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는데.
“그 무렵 ‘소년시절 과거에 합격하면 좋게 죽지 못한다(少年登科 不得好死)’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사실 언짢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새겨들어야 할 경고였다. 나는 운(運)이 좋은 것일 뿐 결코 실력이 나은 게 아니었다. 까불지 말고 계속 공부하고 연마하며, 나서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처신하는 것만이 ‘소년등과’의 불행을 완화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運이 좋았을 뿐...겸손한 자세로 처신”
- 평생 삶의 좌표로 삼고 있는 원칙이 있다면?
“젊은 검사 때는 청심수분(淸心守分·깨끗한 마음과 분수 지키기)을, 고위 공직 때는 여인불경(與人不競·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다)과 위공무사(爲公無私)를, 퇴임 후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무리하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중도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떤가?
“대개 오전 7시쯤 기상하고 밤 10시쯤 취침한다. 거의 매일 개인사무실로 나와 점심을 해결하고 지하철로 이동하며 하루 1만보를 걸으려 한다. 조간신문 1개를 정독하며, 매일 밤 일기장을 기록하고 혈압 측정, 하루 걸은 걸음수 적기를 빠짐없이 한다.”
그는 “어떻게 하다 보니 하루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기가 거북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아왔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 이런저런 생각으로 눈이 말똥해지면 아무 것이나 잡고 읽기를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잠들게 된다. 책읽기가 수면제(睡眠劑) 역할을 한다”고 했다.
- 나라의 원로(元老)로서 국민들께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함께 삶을 영위하게 된 숙명(宿命)을 안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서로 존중하는 자세로 살아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경쟁이 심해진 탓인지 분열과 대립, 갈등과 증오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 ‘상호 존중’이 그 해결책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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