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2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를 국빈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 환송식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뉴스1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당 쇄신을 위해 띄우겠다고 공언한 혁신위원회가 구성 첫 단계인 위원장을 구하지 못하면서 출범에 난항을 겪고 있다. 김 대표 측은 “적임자를 찾기 어렵고, 제안해도 고사하는 분이 많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김 대표가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거나 전권을 가진 혁신위를 꾸릴 생각이 없으니 제안받은 인사들이 기피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대표에 종속되고 권한도 없던 민주당의 ‘김은경 혁신위’ 재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지난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다음 날 쇄신안 중 하나로 혁신위원회 출범을 제시했다. 이후 지난 19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혁신위원장을 발표하기로 했지만 인선을 하지 못해 23일로 기한을 늦췄다. 하지만 김 대표는 22일 늦게까지도 위원장을 내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는 기한을 늦추더라도 원내보다는 당 밖에 있는 외부 인사에게 혁신위원장직을 맡기겠다는 구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김 대표는 원외 인사를 우선순위에 두고 혁신위원장을 물색했지만, 당사자들이 고사했거나 ‘전권을 주지 않으면 맡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변화를 이끌 혁신위원장이 지금 구상대로라면 당대표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외 인사 후보군으로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 이양희 전 국민의힘 윤리위원장 등이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정치권 바깥에 있는 30대 인사에게도 제안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도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한 번에 여러 명에게 의사를 타진할 수 없어 차례로 제안하고 답을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국회서 열린 고위 당정 협의 - 한덕수(왼쪽) 국무총리와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2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 협의회 회의실로 이동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은 윤재옥 원내대표, 왼쪽은 유의동 정책위의장이다. 고위 당정은 그동안 주로 총리 공관에서 열렸지만 이날은 국회에서 열렸다. /이덕훈 기자

일부 최고위원들이 하태경 의원과 윤희숙 전 의원을 추천했지만, 김 대표가 이들에게 별도로 제안은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 의원은 지난 20일 라디오에서 혁신위 구성의 자율성과 운영의 독립성을 전제로 “제안이 오면 혁신위원장직을 맡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 의원은 그러면서 김기현 대표에게 수도권 출마를 권했다. 당 관계자는 “김 대표는 하 의원이 공개적으로 당대표 거취를 언급한 데 대해 주변에 불쾌감을 드러낸 것으로 안다”며 “김 대표는 하 의원이나 윤 전 의원 등에게 혁신위원장을 맡길 경우 ‘상향식 공천’ ‘지도부 전원 험지 출마’ 등 급진적인 요구가 나올까 봐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 대표가 혁신위원장에 너무 많은 조건과 제약을 걸고 있기 때문에 임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한 지도부 인사는 “김 대표는 혁신위원장이 어떤 권한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보다, 당대표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느냐를 더 중시하고 있다”고 했다. 한 초선 의원은 “김 대표는 당은 당대표를 중심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인사 원칙이 확고하다”고 말했다. 다른 중진 의원은 “김 대표는 원내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내공을 다졌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적 인지도에선 약점을 갖고 있다”며 “스타성이 있거나 전권을 가진 혁신위원장이 등장해 당내 ‘이중 권력’이 생기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일부 지도부 인사들은 지난 19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김 대표에게 파격적인 인선을 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한 최고위원은 “기존의 국민의힘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오게 되면 혁신으로 평가받기 어렵다”며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당이 변화한다는 상징성을 가진 인물을 모셔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혁신위원장을 누구로 할지에 앞서 혁신위의 목표와 권한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혁신위의 성격부터 명확히 하고, 그에 걸맞은 사람을 데려오자는 것이다. 다른 지도부 인사는 “어떤 혁신위원장을 데려오겠다는 ‘콘셉트’가 명확하면 그에 맞는 인사를 추천이라도 할 텐데, 그런 것도 없다”며 “그러다 보니 후보군도 일정한 기준도 없이 중구난방이 됐다”고 했다.

혁신위 출범이 늦어지는 데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이준석 당시 대표는 6·1 지방선거 승리 다음 날 “이길 때 바꿔야 한다”며 최재형 의원을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자유한국당 시절인 2017년 7월 홍준표 당시 대표도 취임 기자회견에서 혁신위 구성 계획을 밝힌 지 일주일 만에 류석춘 연세대 교수를 위원장에 임명했다. 한 중진 의원은 “국민들은 혁신위의 위원장과 위원 면면으로 혁신 의지를 평가하고 그걸 동력으로 삼아 혁신안을 만들어 가는 건데, 혁신위원장 인선 단계부터 지지부진한 모습을 노출하면서 혁신의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했다.

이 때문에 당 안팎에서는 “어설프게 혁신위를 꾸렸다가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처럼 할 바에는 지금이라도 혁신위원장 인선을 중단하고 다른 방식의 혁신을 찾으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교수 출신인 김은경 혁신위원장은 지난 6~8월 활동하는 동안 초선 비하, 노인 폄하, 가정사 논란 등으로 동력을 상실했고, 혁신위에서 제안한 대의원제 축소, 현역 의원 공천 불이익 강화 등의 혁신안도 유야무야됐다. 당 관계자는 “영화 주연도 섭외 과정이 다 노출되면 뒤늦게 제안받은 배우도 거절하기 마련인데, 혁신위원장직을 거절한 인사들 명단이 도는 상황에서 누가 맡겠다고 할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김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혁신위원장 인선에 대해 “최대한 속도를 내고 있다”며 “곧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