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하류 세력은 뒷전에 서야 한다.”
최근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 포기를 강력히 압박하고 있다. “당 지도부 및 중진 의원, 대통령과 가까이 지내는 의원들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수도권 험지에 출마하는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언급하며 그 범위를 지도부, 윤핵관까지 넓힌 모양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당내 텃밭이라 불리는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의 중진 의원을 향했었다. ‘낙동강 정당’을 넘어 ‘한강 정당’이 되기 위해 영남 중진들이 나서야 한다는 이른바 ‘영남 물갈이론’이다. 그는 당선 희망 없는 수도권에서 안 되더라도 용기 있게 싸우는 영남의 ‘계백’이 되라며 김기현(4선·울산 남구을), 주호영(5선·대구 수성을), 장제원(3선·부산 사상구) 등 특정 영남 의원을 콕 집어 거론하기도 했다.
물갈이론을 지켜보는 영남 유권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지난 11월 7일과 8일 기자가 만난 영남권 주민들 대다수는 중진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면서도, 막상 그것이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는 회의적이었다.
“현역들도 낙하산, 바뀌어야 한다”
대구 중진 의원 지역구의 한 상인(60대)은 “오래된 분들이 워낙 자기 할 일을 안 하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이라며 “초선보다는 재선이 낫지만 중진보다는 초선이 낫다”고 말했다. 물갈이가 낙하산용이어도 괜찮은지 묻자 “현직 지역구 의원들도 다 위에서 낙하산 돼서 내려왔다”며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뉘앙스였다. 같은 지역구의 또 다른 상인(50) 또한 “○○○ 의원이나 △△△의원은 잘하지만 그외에 나머지 묵은둥이들은 완전 아무것도 안 한다”라며 변화의 필요성에는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국힘 공천만 받으면 다 똑같을 것이다. 선거운동을 하면 선거운동원이 제일 먼저 오고, 그다음이 구의원이고, 그다음이 시의원이고, 국회의원 후보는 당선도 안 됐는데 공주마마 납시듯이 제일 늦게 와서 인사한다”라며 근본적인 혁신이 없다면 어차피 똑같을 것이라는 불신을 드러냈다.
대구, 남성, 60대, 국힘당원 등 이른바 ‘진짜 보수’라는 요소를 모두 갖춘 시민들 중에서도 최근 국민의힘 지지에 회의감을 느낀다며 물갈이론에 동의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대구 중진 의원의 지역구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모씨(60대)는 30여년째 국민의힘 당원이지만, 지금의 지역 정치에 매우 불만을 갖고 있다며 “중진이든 재선이든 초선이든 지역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구의 현직 의원들을 보면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수막에는 예산 편성해왔다는 얘기뿐이다. 누구나 주는 건데 업적을 쌓으려는 보여주기용이다. 진짜 보수인 친구들끼리도 이젠 민주당이나 국힘이나 똑같이 본다. 보수 지역에 살고 있고 가치관이 보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뽑아주는 거지, 민주당이 특출나면 이젠 민주당을 찍을 것이다. 윤핵관이든 낙하산이든 상관이 없긴 하지만, 대통령과 먼 인물일수록 참신하고 일을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10여년째 국힘 당원이라는 대구 중진 의원 지역구의 서모씨 또한 “평생 직장도 아니고 많이 해먹은 사람들은 이제 전투력 있는 젊은이들한테 넘겨줘야 된다. TK는 국힘이라면 일단 무조건 믿고 뽑아주다 보니 당선 이후에는 나태해져서 자기 이득만 챙기게 되니 물갈이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먼 인물일수록 일 잘할 것”
혁신위원장이 쏘아올린 ‘물갈이론’에 당 주류인 영남 중진 의원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윤계인 하태경 의원(3선·부산 해운대구갑)이 유일하게 수도권 출마를 선언했고, 주호영 의원은 “수도권에 절대 갈 일이 없다”고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한 상태다. 불출마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김기현 대표는 지난 11월 9일 “모든 일에는 시기와 순서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장제원 의원의 경우도 지난 11월 9일 김규완 CBS 논설위원장의 입을 통해 “99% 다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한다”는 입장이 전해진 상태다. 영남 물갈이론이 제기된 직후 일부 영남 의원들은 “영남을 잡아놓은 고기 취급하며 큰 상처를 준 것”이라며 반발하고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영남을 홀대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었다. 이와 더불어 정치권에서는 영남 물갈이론의 목적이 대통령 최측근을 낙하산으로 꽂기 위함이라는 의심도 제기되고 있다.
영남권의 한 민주당 관계자는 영남 중진 물갈이론에 대해 ‘용산 전략 공천’이나 다름없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말만 혁신이다. 총선 때마다 매번 45%정도는 초선이다. 물갈이가 자연스레 되는 것이고 초선이 많은 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공천하려고 영남을 택했고 명분이 없으니 혁신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구 출신이며 대구 현역 의원인 국힘 원내대표가 대구 일에는 관심 없고 서울 메가시티를 부르짖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이 관계자는 TK 유권자 중 이준석 신당을 지지하겠다는 유권자가 30.1%, 국힘이 29.8%, 민주당이 27.6%라는 지난 10월 30·31일 피플네트웍스리서치(PNR)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주며 “가상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1위를 한 것을 보면, 영남 물갈이론에는 동의하지만 낙하산을 보낼 경우 민심이 용납하지 않을 것을 보여준다”고도 덧붙였다.
영남권의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영남 물갈이론에 대해 “일명 스타 의원들도 수도권에 출마하면 웬만하면 떨어지게 된다”며 “현재 중진 의원들 중 젊은 의원들이 대다수다. 나이가 많으면 깨끗하게 은퇴할 텐데 이제 시작이고 욕심이 있는 젊은 의원들이 험지출마론에 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다선뿐 아니라 초선도 불안해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또 다른 영남권 국힘 관계자는 “원래 총선을 앞두고서는 여러 얘기가 나오고 하루하루 달라진다”며 “영남 물갈이론은 아직까지는 한 가지 방법론이 아니겠나”라고 판단을 유보했다. 시민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호남지역이든 영남지역이든 물갈이론에 대해서는 언제나 긍정적이더라. 현 정치세력을 마음에 들어하시는 시민들은 드물다”고 말했다. 물갈이론이 낙하산용이 되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는 “낙하산과 참신함을 어떻게 구별하겠나. 당론을 어떻게 끌어갈지, 해석을 어떻게 할지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물갈이 텃밭 노리는 대통령실 참모들
영남 물갈이론은 자연스럽게 여당 내총선 경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특히 대통령실, 내각의 개편과 맞물려 대통령실 참모진 개편이 이뤄지면서 수석비서관부터 행정관까지 25~30명(전직 포함)이 총선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향이나 학연 등 연고를 들어 대구·경북(TK), 부산·경남(PK) 등 ‘텃밭’ 지역으로 몰려갈 태세다. 강명구 국정기획비서관의 출마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경북 구미을의 경우 김영식 의원(초선)이 현역이다. 국민의힘 구미시당 관계자는 “당 대 당 싸움이니 이기는 수를 두는 게 우선이고, 그중에서도 차출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그러나 3선이나 스타 등 특정 조건을 가진 중진을 향해 인위적으로 불출마나 수도권 출마를 강요하는 것은 피선거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초선이든 재선이든 중진이든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 물갈이론이 본격화되면 시민들도 반대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강 비서관은 조만간 사표를 내고 출마선언을 할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 비서관은 대통령이 국민의힘 입당 초기 직접 만나 캠프 합류를 제안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