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이른바 ‘연구비 카르텔’ 논란으로 대폭 삭감된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안을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일부 복원하는 방안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과학기술계 내부와 30·40대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부 예산안이 연구 현장과 소통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여당이 보완에 나선 것이다.
지난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여당이 여론, 특히 젊은 세대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요한 혁신위원장도 이날 조만간 발표할 4호 혁신안에 ‘R&D 예산 보완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유의동 정책위의장, 국회 예산결산특위 여당 간사인 송언석 의원 등은 이르면 13일 R&D 예산안 일부 복원을 포함한 ‘내년도 예산안 심사 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우선 복원하기로 한 R&D 예산은 올해보다 2000억원 삭감(-6.2%)된 젊은 과학자 인건비와 기초연구 지원 분야다. 2조원 규모의 기초연구 지원 예산은 주로 대학에 투입되는데, 정부안 규모로 삭감될 경우 포닥(박사 후 연구원)과 비전임 연구원 등 미래 인력이 연구 현장을 떠나거나 급격한 해외 두뇌 유출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국민의힘은 큰 폭으로 줄어든 기초연구 지원 예산을 일부 복원하고, 이공계 대학생과 대학원생에 대한 장학금 지원 규모를 대폭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우수 연구로 꼽히는 ‘다목적 방사광 가속기 구축 사업’ ‘중이온 가속기 선행 R&D’ 등 수월성 분야 사업비도 증액하기로 했다. 기초과학 분야의 국내 최고 연구 기관인 IBS(기초과학연구원) 운영비도 전년 수준으로 회복하고, 우주·양자 기술 등 핵심 분야의 국제 협력 관련 예산도 늘리기로 했다. 올해보다 10.8% 줄어든 정부 출연 연구 기관 예산도 일부 보전해 주기로 했다.
국민의힘이 윤석열 대통령 의중에 따라 대폭 삭감된 R&D 예산안 재조정에 나선 것은 내년 4·10 총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지난달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의 교훈은 ‘당정이 여론에 좀 더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연구비 카르텔’ 기득권과 무관한 30·40대 젊은 연구자들까지 반발하고 나선 것은 위험 신호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여당은 올해보다 2000억원 삭감(-6.2%)된 기초연구 지원 예산을 우선 증액할 예정이다. 예산 삭감이 학생 연구원 등 신진 연구자들의 고용 불안을 초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년보다 3000억원 삭감(-10.8%)된 정부 출연 연구 기관 예산에 대해서도 대량 실직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감안해 삭감 폭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국민의힘은 특히 정부 출연 연구 기관들이 서로 자유롭게 협력해서 연구할 수 있는 통합 예산을 확대할 예정이다. 비슷한 주제로 각자 연구하는 예산 낭비를 줄이는 대신, 융합 연구를 늘리라는 취지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공계 대학생과 대학원생에 대한 장학금 지원 규모도 큰 폭으로 확대해 미래 유망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초고성능 거대 현미경’이라고 하는 다목적 방사광 가속기 구축 예산도 당초대로 투입하기로 했다. 다목적 방사광 가속기 구축 사업은 예산 삭감 여파로 건설 계획이 1년가량 지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었다. 또한 예산 51억여 원이 전액 삭감된 내년도 중이온 가속기 선행 R&D 예산도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중이온 가속기는 우라늄 같은 무거운 원소를 빠르게 가속한 뒤 표적이 되는 원소와 충돌시켜 종전에 없던 희귀한 동위원소를 만드는 장치로, 한국에는 아직 완성된 중이온 가속기가 없다.
기초과학 분야의 국내 최고 연구 기관인 IBS(기초과학연구원) 운영비는 전년 수준으로 회복한다는 계획이다. 당 관계자는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의 연구 시설 구축 예산은 계획을 늦추기보다 당초 계획대로 투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여당은 수퍼컴퓨터, 양성자 가속기, KSTAR(초전도 핵융합 연구 장치) 연구 등 대형 연구 시설의 전기료 부담도 예산을 통해 우선적으로 해소해 주기로 했다.
국민의힘은 R&D 예산안 일부 복원을 발표하더라도 구체적 증액 규모를 공개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당 관계자는 “기획재정부가 구체적인 증액 규모에 대한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섣불리 액수를 공개했다가 민주당 등 야당이 ‘그보다 더 증액하라’고 압박할 구실을 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서 지난 8월 29일 발표된 내년 예산안에서 R&D 예산은 올해보다 3조4000억원(13.9%) 줄어든 21조5000억원으로 결정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말 열린 국가 재정 전략 회의에서 ‘R&D 예산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대대적 검토와 방향 수정이 이뤄진 것이다. 연구비를 관행적으로 나눠 먹는 이른바 ‘연구비 카르텔’이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에서는 “기초연구 예산 대폭 삭감으로 대학의 연구 여건이 악화되고,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은 최소한의 운영 비용과 비정규직 인건비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어 대량 실직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등의 비판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이에 따라 국민의힘 과학기술특별위원회는 지난달 31일 R&D 예산 삭감과 관련한 현장 목소리를 듣는 간담회를 열었다. 또 과기특위 부위원장인 김영식 의원 등이 기획재정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대안을 만들었다고 한다.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이후 새로 임명된 유의동 정책위의장도 당이 주도해서 R&D 예산안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관계자는 “R&D 예산안 조정 과정에서 정부와 대통령실 등과도 소통하고 있지만, 주도하는 열쇠는 여당이 쥐고 있는 것이 맞는다”며 “좀 더 기민한 모습으로 여론에 대응해 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