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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에 해당하는 ‘3050클럽’의 세계 7번째 회원국이다. 반도체 같은 IT 분야에선 손꼽히는 강국(强國)이며 경제규모와 문화·스포츠·국방 분야에서도 세계 10위권 안에 든다. 겉으론 세계가 부러워하는 글로벌 상위 선진국의 모습이다.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가 2023년 11월 8일 오후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려대 법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대 로스쿨에서 수학(修學)한 그는 사법시험(30회)과 미국 뉴욕주 변호사시험에 각각 합격했다./이태경 기자

중견 법학자인 홍승기(洪承祺·64)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두 달 전 발간한 저서 <중세지향 퇴행사회(中世志向 退行社會)>에서 “압축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아직도 근대화를 거부하고 식민 사회에 머무려는 중세지향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기자는 2023년 11월 8일 낮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나 2시간 가까이 인터뷰했다.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장과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를 지낸 그는 현재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과 콘텐츠분쟁조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근대는 망각...다시 중세 왕조 찾는 한국

- 지금 한국이 왜 ‘중세지향 사회’인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근거가 많다. 화폐의 초상화만 봐도 미국·유럽·일본은 물론 중국도 마오쩌둥이란 근대인을 지폐에 새겨놓고 있지만 한국엔 신사임당·세종·이율곡·이황 등 조선시대 인물 뿐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도피로를 ‘왕의 길’이라고 복원한데 이어 광화문 경복궁 앞과 덕수궁 대한문 앞 월대(月臺), 경복궁 내 전각(殿閣)의 지나친 복원까지 온통 중세 왕조(王朝) 지향이다.”

2023년 10월 복원된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와 주변 모습. 월대 복원으로 인해 광화문 앞 도로가 곡선형으로 휘어 교통 영향이 불가피하다./뉴스1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사료(史料)를 보면 경복궁 앞 월대는 1866년 축조돼 57년 동안 존재했다. 고종이나 순종이 월대에서 백성을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 덕수궁 앞 월대는 10년 남짓 있었다. 둘 다 도시계획 과정에서 사라졌을 텐데, 누구를, 무엇을 위한 복원인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중세지향성’이 있다면?

“가장 심각한 것은 한국인의 정신 세계가 식민지 시대 탈출을 거부하고 일제시대에 머무르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78년, 즉 35년의 식민 기간 보다 두 배 이상 긴 시간이 흘렀지만, 정치인은 물론 상당수 지식인들조차 식민지 시대의 사고방식과 논리에 갇혀 있다.”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한 예로 국가보훈부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지금도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발표한다. 서울교통공사는 그 국가보훈부의 포스터를 지하철 역사(驛舍)에 게시하고 있다. 공공 부문이 ‘탈식민 거부’에 앞장서는 형국이다. 대학교수, 언론까지 친일(親日)·반일(反日) 이슈에 과민 반응하며, 반일을 외치지 않으면 누구든지 매국노(賣國奴)로 지탄받을 수 있다.”

서울교통공사가 서울시내 지하철 역에 게시한 2023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모습/홍승기 교수

◇反日 안 외치는 지식인에겐 손가락질

홍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몇 년 전 정부가 반일몰이를 하던 시기에 교가(校歌)의 작곡·작사가가 친일파라고 전국이 떠들썩했다. 상당수 전국의 명문고교가 그 때문에 교가를 바꾸었다. 역사가 오랜 학교의 교사(校史)전시관에서 해방 전 일본인 교장·교감의 액자를 떼 내는 모습이 자랑인 양 TV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역사 수정주의이고 反역사적 일탈이다.”

- 일본과 얽힌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한국 사회의 식민지 시대 탈출을 가로막는 최대 주범은 친일(親日) 프레임이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1983년부터 2022년 말까지 40년간 일본 천황과 총리는 일본의 한국 병합(倂合)에 대해 총 53회 공개 사과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4회, 아베 신조 총리는 19회였다. 사실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경영을 사과한 사례는 일본과 이탈리아 정도 뿐이다. 이탈리아는 2008년 당시 리비아가 원유 수출을 끊겠다고 나오자 원유를 계속 공급받기 위해 사과했다. 세계 10위권 대국인 우리가 일본에게 제국주의 시대 역사를 사과하라고 계속 요구하는 것은 소아병(小兒病)적인 행태이다. 혹자는 일본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고도 트집 잡는데, 연세대 김철 명예교수의 표현을 빌면 진정성의 요구 그 자체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 그런데도 공공영역이 나서서 ‘토착왜구’ ‘죽창부대’ 같은 초라한 주장을 했으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1990년 5월 24일 일본 도쿄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불행했던 시기에 한국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에 통석(痛惜)의 염을 금할 수 없다"며 공식 사과하고 있다. 이는 1984년 9월 6일 히로히또 천황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는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사과한 후 일본 천황의 두 번째 공개 사과였다. 사진은 1990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1면/인터넷 캡처
이창위 서울시립대 교수가 2023년 1월 발간한 단행본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 이 교수는 이 책의 178쪽부터 182쪽까지 6개면에 걸쳐 1983년부터 최근까지 일본 천황과 총리의 한일 과거사에 대한 53건의 사과 일지를 적시하고 있다.

-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과거’·'일본’에 매몰됐나?

“이승만 대통령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역대 정권은 빈곤 탈피를 목표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近代化)에 매진했다. 역대 정권은 반일을 소품으로 일부 이용해도 밀고당길 줄을 알았다. 19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을 계기로 폭발한 국내 반일(反日) 에너지를 활용해 전두환 정권은 일본을 압박, 40억달러 안보·경제협력차관과 1984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식민지 사죄 발언을 받았다. 그런데 1993년 2월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은 ‘임시정부 이래 최초의 정통 정부가 문민정부’라며 해방 후 한국인의 성취를 부정(否定)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식의 근대화’ 과정에 심각한 병목 현상을 가져왔다고 본다.”

◇日 천황·총리 40년간 53회 공식 사과

- 특별한 계기가 있나?

“해방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가 중앙청을 해체·폭파한 사건이 분수령이다. 1926년 완공된 중앙청은, 일제가 총독부로 쓴 기간(18년) 보다 우리가 정부청사로 사용한 기간(50년)이 훨씬 길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에서 반일(反日) 감정을 최대한 이용하겠다고 깨부수었다. 중앙청의 소멸은 한 개의 건물 해체를 넘어 근대화 정서의 파괴였다. 해방 후 지속된 근대화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북한식(式)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중앙청 건물의 첨탑을 기계톱으로 절단해 크레인으로 제거하는 공사를 했다. 이후 중장비 기계를 동원해 중앙청을 무너뜨리고 있다. 중앙청 건물은 1996년에 완전 해체됐다.
충남 천안시 목천읍 소재 독립기념관 본관 바깥에 있는 중앙청(조선총독부) 건축물의 석재를 뜯어서 만든 공원 모습. 한글, 영어, 일본어로 각각 작성된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상징이었던 첨탑을 지하 5m에 반(半)매장하였고 전시공원을 해가 지는 독립기념관의 서쪽에 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과 식민잔재의 청산을 강조하였다."/홍승기 교수
199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이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조선일보DB

홍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김영삼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일본 등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하며 민족 지상주의(至上主義)에 빠진 북한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겠다는 전환적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북한식 백두사관(白頭史觀)에 대한 경계가 풀린 듯싶다.”

그는 “이런 분위기는 1970년대 중후반 이후 대학가에서 불붙은 의식화 교육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 같은 풍토 위에 불량(不良) 정권 북한에 매력 또는 연대감을 느끼고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은 운동권에 의해 급물살을 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2020년 6월 당시 서울 마포구에 있는 정의기억연대 사무실 모습. 당시 검찰은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사용 의혹 등을 수사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였다./조선일보 DB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기부금 횡령 의혹과 '위안부' 피해자 안성 쉼터 매입·매각 관련 의혹이 이어지고 있던 2020년 5월 20일 낮,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자유연대 회원들이 정의연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조선일보DB

“1990년 11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세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와 정의기억연대(약칭 정의연)가 좋은 예이다. ‘20만 명의 소녀 강제연행’ ‘유례를 찾기 힘든 잔학함’이라는 그들의 표현은 북한의 시나리오와 흡사하다. 윤미향은 1992년 8월 ‘지금 남북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정신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해 내고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 역량이 마련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북간 국교 수립을 위한 회담 시기의 발언이다.”

◇민족 앞세운 김영삼...북한式 민족주의에 동조

- 2000년대 들어서는 어떠했나?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세워진 ‘친일반(反)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중세지향·퇴행사회의 예이다. 이 위원회 활동은 그 자체가 국가 폭력이다. 해방 후 60년 세월이 흐른 후, 당대의 내밀한 사정에 무지한 후배들이 조악한 기준으로 한국의 당대 엘리트들을 단죄했다. 1955년 대한민국 정부는 제2대 부통령 인촌 김성수(金性洙)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렀고 1962년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追敍)했다. 그런데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인촌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고 서훈까지 박탈하는 야만을 자행했다.”

그는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판단은 반(反)헌법적 행위로 ‘전적으로’ 무효화해야 한다. 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은 사람들의 재산을 박탈한 것은 헌법 위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2항은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明示)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4년 7월 14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소속 의원들이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개정법률안 발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 법에 의거해 이듬해 '친일 반(反)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조선일보DB
2017년 11월 1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서울 서대문구 대학 캠퍼스 내 김활란 동상 앞에 설치한 팻말.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라고 적혀 있다(왼쪽). 같은 해 7월엔 서울 고려대 총학생회 등이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 성북구 안암동 본교에 설치된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철거를 요구했다./조선일보DB

홍 교수는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된 큰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과 위원장을 맡은 강만길 교수, 편협한 시각의 국사학자들은 물론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에 있다. 2011년 3월 31일 헌법재판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해 헌법전문의 ‘임시정부의 법통’ 운운하며 위헌이 아니라고 결론냈다. 조대현·이강국 재판관만이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이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이 ‘오늘 이 순간’ 재산권의 귀속을 다투는 준거가 된다는 판단은 터무니없는 논거이다.”

◇운동권 동아리하듯 국가경영한 문재인 정권

- 역대 정권 가운데 ‘중세지향 퇴행성’이 가장 강했던 곳을 꼽는다면?

“문재인 정권이라 단언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3류 대학 운동권 학생들이 동아리를 운영하는 사고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자유·인권·민주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국가를 향해 대통령이 TV 앞에서 ‘다시는 지지 않겠다. 승리의 역사를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정권 5년이 우리나라에 앞으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8월 2일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일본을 비난하며 "우리는 다시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이 사실을 보도한 2019년 8월 3일자 조선일보 A1면/인터넷 캡처

- 왜, 어떤 이유 때문인가?

“문재인 정권은 5년 내내 ‘엉뚱한 제도’를 ‘부적절한 방식’으로 도입해 기업인을 옥죄고, 자영업자를 괴롭히고, 국민의 건전한 근로의욕에 흠집을 냈다. 검수완박으로 검찰을 식물검찰로 만들어 특정인에 대한 형사처벌의 예외를 구축하고, 통치의 정통성을 실체가 애매한 ‘항일(抗日)투쟁’에 두었다. 조선시대 양반 특권층과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부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저서에서 언급한 여러 한국인들 가운데 근대 지향성이 가장 뛰어난 이는 누구인가?

“이승만, 윤치호, 서재필, 유일한 같은 분들이 모두 훌륭하지만, 이승만(李承晩)은 당대에 나오기 힘든 ‘돌연변이’였다. 그는 탁월한 개인기(個人技)와 사명감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존재를 공론화했다. 이승만에 압도된 한국 좌파는 어떻게든 그에게 흠집을 내고자 흑색 선전을 하고 김구를 대항마로 띄워 이승만을 깎아내리고 있다. 반공(反共)주의자인 김구는 기본적으로 좌파와 융합이 안 되는 존재이다. 좌파에게 김구는 김일성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이자, 이승만 공격을 위한 소모품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지낸 우남 이승만(왼쪽)과 백범 김구가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이던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민주의원 회의'를 마친 후 서울 창덕궁 앞에서 악수하고 있다./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정치 낭인’들 공공영역 진출로 국가경쟁력 쇠퇴

- 1980년대 5·6공화국과 1990년대 김영삼·김대중 양김(兩金) 정권을 비교한다면?

" 70년대 말 대학에 입학한 세대로서 88올림픽의 성공은 인정해도 정서적으로 전두환·노태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월이 흘러 여러 자료를 확인하고서야 ‘전두환 시대 경제성장의 과실(果實)을 양김이 뜯어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5·6공 시절에는 일류 엘리트들이 국가를 경영했다. 양김 시대에는 나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정치 낭인(浪人)’들이 대거 공공영역으로 넘어오면서 국가경쟁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홍 교수는 개인적인 일화를 꺼냈다.

“1997년 가을 미국 로스쿨에 등록한 지 3개월 만에 700원대이던 원·달러 환율이 1900원대로 치솟았을 때 ‘나라 잃은 국민’ 심정을 느꼈다. 당시 아시아 경제위기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 갔다가 한 투자은행 발제자가 ‘한국 정부 의뢰로 한국 경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인도네시아·태국과 비교해 컨설팅을 해주었더니 한국정부가 돈은 잔뜩 주고서 컨설팅 결과를 덮어 버리더라’고 폭로했다. 1995년 11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큰소리쳤던 김영삼 정부의 국가 경영능력은 엉망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대응 실패로 대한민국은 사상 초유의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았다. 사진은 1997년 12월 11일 국내은행 외화 환전 창구 직원이 미국 달러화당 1771원으로 치솟은 원화 환율을 게시판에 새로 기재하는 모습/조선일보DB

- 근대 사회는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깨어있는 개인(個人)’들의 결사체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2016년 하반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동과 문재인 정부 시절 조국(曺國)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조국 현상’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망령이 깊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1930년대 독일 국민의 투표로 정권을 장악했듯, 대한민국에는 선동되려는 기층 민중과 선동에 도(道)가 튼 정치꾼들, 선동으로 먹고사는 사이비 언론이 즐비하다. 매우 취약한 구조에서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 우리나라가 ‘중세지향 퇴행’을 끊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선진국 문턱까지 갔다가 중후진국으로 추락한 아르헨티나처럼 될 것이다. 아직은 우리 기업들이 튼튼해서 다행이지만, 후진국 몰락은 순식간일 것이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노란 봉투법’처럼 틈만 나면 기업들을 옥죄고 경쟁력을 약화시키려 안달 내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정권이 이재명으로 연결되었더라면 남미(南美)든 북조선이든 눈 앞에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때 선진국이던 아르헨티나는 만성적인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을 겪고 있다. 일례로 2020년 개정 시행된 ‘임대차법’으로 인해 월세 물량이 자취를 감춰 2023년 6월 월세 상승률(전년 대비 145%)이 물가 상승률(120%)을 넘었다. 사진은 2023년 5월 18일(현지 시각)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건물 외벽의 대형 얼굴 그림은 ‘에비타’로 더 잘 알려진 에바 페론(1919~1952) 전 대통령 부인/AP연합뉴스
2023년 11월 13일 낮 연세대학교 서울 신촌 캠퍼스안에 신전대협이 부착한 대자보. 이들은 "노란봉투법에는 청년도, 미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신전대협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찬성반대 쟁점/그래픽=연합뉴스

◇“근대 사회로 가려면 사회 知力 높여야”

- 이를 막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의 지력(知力)을 높여야 한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널리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는 습관이 붙어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의 허리로서 건강한 지식인층이 구축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지식인층에서 국가 미래를 개척하고 이끄는 핵심 엘리트가 나와야 한다. 사실은 이 세 가지 모두 ‘많이 읽자’는 얘기다.”

- 좀 생뚱맞다.

“쉬운 예로 일본을 얘기하겠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까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 전체에 다져진 지력(知力)이 있었다. 그 지력은 독서에서 생긴 힘이었다. 일본에선 지금도 매년 1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여럿 나온다.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 구독자는 요즘도 각각 900만명, 600만명에 달한다. 독서를 통해 축적된 내공(內功)으로 기발한 생각과 야망, 목표를 품은 일본인들은 세계 정상에 오르고 있다. 디지털 분야에서 주춤하고 있으나 일본의 내공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2023년 현재 일본 1만엔권 지폐에 새겨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 적극적인 근대화론자로 게이오대학을 세운 그가 서양을 돌아보고 1866년에 낸 책 <서양사정(西洋事情)>은 단번에 20만부가 팔렸다. 그가 1872년 첫편을 출간한 <학문의 권유(学問のすゝめ)>는 1800년대에 300만부 이상, 지금까지 400만부 넘게 팔렸다. 19세기 일본 총인구가 300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국민 10명 중 한 명이 구입해 읽은 셈이다. 일본 근대화를 이룬 주역은 '책 읽는 국민'이었다.

홍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제 전공인 지적(知的)재산권 분야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일본과 한국 학계는 논문의 질(質)과 양(量)에서 10대 1 정도 격차가 나는 듯하다. 두 나라의 인구는 2대 1 정도지만. 우리 학계는 호흡이 짧고 유행에 따라 연구 주제가 오락가락한다. 재작년에는 NFT, 작년에는 메타버스만 외치더니 금년에는 모든 포럼·학회의 주제가 챗(Chat)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일색이다. AI가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도 이렇게 쏠리기만 해서야 축적이 되겠는가?”

- 한국 지식인들이 공적 이슈로 논쟁하거나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게 사라진 것 같다.

“한국 지식인 사회의 절반은 논문과 강의로 먹고사는 샐러리맨이고, 나머지 절반은 폴리페서(polifessor·정치 지향 교수)라는 말이 있다. 교수 연봉이 20년 가까이 동결된 탓인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대학진학률은 80%가 넘는데도, 지식인들의 담론(談論) 수준이 졸렬하다. 우리 사회에 과연 ‘지식인 집단’이 존재하는지 회의(懷疑)할 때가 많다.”

◇대학진학률 80%인데 지식인들 담론 수준 졸렬

- 우리 사회 전체가 붕 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한국이 예능국가화하고 있다’는 지적에 나도 동의한다. 나라 전체가 이성 보다는 감성, 윤리보다 인기, 깊이 보다 자극을 선호하며 먹방과 트롯,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빠져있다. 지식인들조차 진득하게 공부하며 깊이 있는 글을 쓰기보다 SNS에 몰두한다. 기자들도 SNS 베끼기 바쁘고. 대학도 정부 연구기금도, 실적용 논문을 요구할 뿐 제대로 된 학술서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붕뜬 사회는 교묘한 선동과 포퓰리즘은 물론 다수결로 포장한 정치 집단의 떼쓰기를 이겨낼 수 없다.”

먹방 유튜버 삼대장이 화제의 초대형 컵라면 '팔도 점보 도시락' 비우기에 도전하고 있다. 기존 제품보다 8.5배 큰 용량이다. /유튜브
국회의원 태영호와 국회의장·국무총리를 지낸 정세균의 SNS. 왼쪽은 '태영호 로제 떡볶이 먹방', 오른쪽은 '정세균 틱톡 댄스'/유튜브·틱톡 캡처

홍 교수는 “유튜브나 동영상, 예능의 힘조차도 텍스트(text)에서 나온다. 현재 영상산업·엔터테인먼트산업이 약진한다고는 하지만 ‘텍스트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그 영상산업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불안이 있다. 출판시장이 궤멸 상태라 걱정”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거듭 강조하지만 ‘읽는 사회’가 근대로 가는 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가 협력해 ‘책 읽는 사회’를 장기 정책으로 꾸준히 실천하기를 희망한다. 읽는 사회, 생각하는 사회가 성숙해야 청소년층이 건강해지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 집단이 형성되고, 성장이 가능한 밝은 미래가 열린다.”

◇“尹 정부는 좌익 공세 물리치고 사회 방어해야”

-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윤 정부의 국방 외교정책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예우(禮遇)를 갖추는 점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청년 전문가들과 신진 엘리트의 발굴에 인색한 점은 아쉽다. 윤석열 정부의 목표는 이승만 대통령이 수립한 공화정의 진전, 즉 좌익 전체주의 공세로부터의 사회 방어여야 한다. 그에 걸맞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수혈하기 바란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11월 1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3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청년의 약속' 선포식에서 축사하고 있다./뉴시스-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대학에서 청년들을 접하면서 무엇을 느끼나?

“종북(從北)이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청년들이 거의 없다는 게 희망적이다. 사회 현실에 비판적이라도 이들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 선진국 한국에서 성장한 20~30대는 북한이나 공산주의와는 생래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들은 또 맹목적 민족주의나 낭만적인 통일관에 냉담하다.”

- 앞으로 한국 사회의 주도 세력은 누가 맡아야 할까?

“1980년대부터 외교관과 주재원 자녀들에 대한 교육비 지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 싶다. 덕분에 해외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이 생성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부에 태어나 조기(早期) 유학을 다녀온 30대와, 외고·과학고에서 국제 감각을 체화(體化)한 이들도 한국 사회의 큰 자산이다. 국내 젊은 엘리트들도 언어능력과 적응력은 기성 세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따라 최근 출범한 태재(泰齋)대학이 성공하고 확대 운영되기를 바란다. 아무 노력없이 최근 30년 동안 울궈먹은 586 운동권 세대는 분리수거통에 버리고 국제감각이 왕성한 엘리트들로 진용을 짜야 한다.”

-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 사회 최상위 엘리트들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한다. 지금 공공영역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권의 한쪽은 인생에서 한 번도 공부를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운동꾼이 주류(主流)이고, 다른 한쪽은 인생에서 한 번도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오렌지족이 주류이다. 대한민국의 최근 30년간은 삼성·현대차·LG·SK 같은 대기업들의 힘으로 버텨왔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당면하고 있는 복잡·첨예한 국가 이슈를 해결하려면 지금 수준의 정치인들로는 어림도 없다. 우리와 경쟁하는 G7 선진국들과 중국은 최고 엘리트들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고, 그 사회는 후속세대를 효율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홍승기 인하대 교수가 2023년 9월 발간한 <중세지향, 퇴행사회>. 총 272쪽 분량이다. 그는 <시네마 법정>(2003년), <어느 여행자의 독백>(2016년), <방송작가의 권리>(2020년) 등의 저서와 <치열한 법정>(2009년)이란 번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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