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26일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내년 4·10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승리를 위해 용기 있게 헌신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승리를 위해 뭐든지 다 할 것이지만, 제가 그 승리의 과실을 가져가지는 않겠다”고 했다. 여권에서는 “한 위원장이 먼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며 총선에서 현역을 대거 물갈이하겠다고 예고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간 정치권에서는 한 위원장이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 접전지에 출마하거나 비례대표로 출마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한 위원장은 취임 첫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총선 지휘만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권 관계자는 “한 위원장이 선제적으로 불출마를 선언하며 친윤·중진 의원들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요구가 나올 수 있다”며 “연설에 담긴 여당에 대한 비판적 평가 역시 현역 의원 상당수를 교체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고 했다. 앞서 인요한 혁신위원회는 당 지도부, 중진·친윤 의원들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이에 호응한 인사는 친윤 핵심 장제원 의원이 유일했다.
여권의 차기 대선 주자가 이번 총선에서 ‘배수진’을 쳤다는 의미도 있다. 한 여당 중진 의원은 “불출마는 한 위원장이 정치생명을 걸고 내년 총선에 크게 베팅한 것”이라며 “총선에 승리한 당대표 타이틀로 대선에 직행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대선 도전이 아예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 위원장은 이날 수락 연설 직후 경북 안동·예천의 초선 김형동 의원을 비대위원장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김 의원은 1975년생으로 한 위원장보다 두 살 어리다. ‘586 운동권 특권 정치 청산’을 내세운 한 위원장이 첫 당직 인선에서 70년대생을 선택하며 ‘세대교체’를 예고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김 의원은 안동고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했고, 사법연수원을 35기로 수료한 뒤 변호사로 일하며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을 지냈다. 이준석 당대표 시절 수석 대변인을 지냈으나 계파색은 옅은 것으로 분류된다.
한 위원장은 이날 연설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균형 있는 대응 정책’ ‘진영과 무관하게 서민과 약자를 돕는 정책’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는 원칙 있는 대북 정책’ 등을 강조했다. 그간 야권이 자신들의 의제로 꼽은 정책을 언급하며 탈이념·탈진영 노선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 위원장은 “정부 여당인 우리의 정책은 곧 실천이지만, 야당인 민주당의 정책은 실천이 보장되지 않는 약속일 뿐”이라며 “정교하고 박력 있게 준비된 정책을 국민께 설명하고 즉각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여당의 정책 대응 속도를 높이고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한 위원장은 이날 연설에서 ‘국민’이라는 표현 대신 ‘동료 시민’이라는 표현을 10차례 썼다. ‘동료 시민(fellow citizens)’은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의 연설에 등장하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개인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법무부 장관 자격으로 대전을 찾아 “‘여의도 사투리’가 아니라 5000만명이 쓰는 문법을 쓰겠다”고 했는데, 정치인으로 데뷔한 이날 기성 정치권과는 다른 연설을 한 것이다.
한 위원장은 ‘당정 관계 정립’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통령과 여당, 정부는 헌법과 법률의 범위 내에서 각자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는 기관”이라며 “수직적이니 수평적이니 하는 얘기가 나올 게 아니다. 각자 상호 협력하는 동반자 관계”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정 간에) 누가 누구를 누르고 막고 사극에나 나올 법한 궁중 암투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며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대통령은 대통령이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