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매섭고 선거가 낳은 결과는 이토록 무섭다. “국민이 내려주신 회초리를 감내해야 한다.” 지난 4월 16일 국민의힘 당선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반성의 말을 꺼냈다. 선거를 두고 흔히 ‘민심의 회초리’에 비유한다. 여야는 상대를 ‘심판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며 “저쪽을 때려달라”고 요구했는데 국민이 회초리를 휘두른 쪽은 여당의 종아리였다.
계파 간의 갈등으로 수평적 다툼이 잦던 민주당 계열과 달리 한국의 보수정당은 질서정연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4·10 총선 결과는 피라미드 구조의 안정적인 정당을 사실상 무너뜨렸다. 총선 직후 나온 대통령의 반응은 56자의 입장문을 비서실장이 대독하는 것으로 끝났다. 지난 4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이 나왔지만 충분치 못한 의견 표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사이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물러난 여당은 당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하지만 지도부 구성부터 난항에 빠지며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몇 가지 기록을 썼다. 하나는 여당이 겪은 총선 패배 중 가장 큰 차이의 참패다. 또 다른 하나는 보수정당 사상 초유의 총선 3연패다. 4년 전 21대 총선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포함해 총 103석을 얻어 가까스로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더니 이번에는 108석을 얻는 데 그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말대로 “겨우 명줄만 국민들이 붙여 놓았다”는 말이 어울린다. 4년 간격으로 벌어진 이런 불명예 기록들을 두고 보수정치가 근원적 위기를 맞고 있다며 구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진단이 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로 보수정당의 역량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조직적인 진단이 있다.
과거 강했던 보수정당 리더십의 붕괴
지난 4월 17일 정치권에는 정계개편 이야기가 빠르게 돌았다. 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국무총리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퍼지면서 갖가지 시나리오가 떠돌아서다. 단순히 협치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 정계개편의 가능성까지 여러 시나리오가 제기됐다. 총선이 끝난 뒤 야당이 아닌 여당이 정계개편이라는 격랑에 빠져드는 것은 드문 일이다.
정계개편을 둘러싼 여러 시나리오는 섣부르다는 평가가 많다. 현재의 여당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원심력이 강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고쳐 쓰자”는 구심력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 보수 정당은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지난 세 번의 총선을 치렀고 모두 패했다. 그리고 선거에서 질 때마다 당명을 바꿔 고쳐 써 온 게 지금의 여당이다. 이 때문에 지금의 총선 후 착란(錯亂)도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봉합하는 쪽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다만 이렇게 매조지면 괜찮은 걸까. 두 번의 기록적인 패배를 본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의 ‘정당력’이 약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지적을 이해하려면 과거 강했던 보수정당을 되짚어봐야 한다. 내부 경험을 토대로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국민의힘 전·현직 당직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랬다.
일단 강했던 보수정당에는 강한 당내 리더십이 있었다. 전직 당직자의 이야기다. “박근혜 대통령 때도 비박(非朴)과 친박(親朴) 간에 치열한 다툼을 벌였는데, 그러다가도 필요할 때는 서로 뒤섞여 한자리에 모이기도 했다. 과거라고 보복공천 같은 게 왜 없었겠나. 그래도 협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당대표를 바지사장 취급까진 안 했다.”
그는 “대표적인 게 2016년도 예산안을 처리한 뒤 찍힌 회식 장면이다. 당시에 언론에서도 이걸 두고 야당과 비교하며 새누리당이 강하다고 평가하고 그랬다”고 말했다. 회식 장면이란 김학용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사진으로 일명 ‘감자탕집 사진’이다. 2016년 12월께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여의도의 한 감자탕집에서 김무성 대표와 새누리당 의원 15명 정도가 회식을 했다. 2016년도 예산안을 처리하고 난 뒤 가진 축하 자리였는데 친박이나 비박 가릴 것 없이 서로 섞여 ‘소맥’을 들고 건배하며 밝게 웃는 장면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해결 과제가 생기거나 대외적 목표가 생기면 당대표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게 보수정당의 문화고 이해관계가 맞을 때 결정적으로 응집력이 작용한다는 대표적인 증거가 그 사진 한 장이었다.
또 다른 보수정당의 강점은 당직자의 능력이다. 한 국회 사무처 간부직원은 자신이 국회 의사국에서 일할 때를 떠올렸다. “내 경험에 비춘 사견이지만 민주당보다 국민의힘 쪽 당직자들이 좀 더 합리적이고 뭐랄까 배려심이 있었다. 민주당이 여당일 때도 오히려 민주당 쪽 당직자들보다 국민의힘 쪽이 덜 조급하고 양보하는 느낌이 강했는데 ‘기득권을 오랫동안 누려온 사람들의 여유’로 나는 해석했다.”
당직자들이 등을 돌렸다
과거 민정당 시절부터 보수정당은 대부분의 당직자들을 공채로 채웠다. 민주당 계열보다 공채의 역사가 빠르다. 이 때문에 꽤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실무 당직자 그룹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정치활동가이자 훌륭한 샐러리맨이기도 했다. 계파 나눠 먹기의 자리배치보다는 신상필벌을 통한 능력 평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기본적으로 회사인 정당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당직자가 포진한 정당이었다.
이 두 가지 장점은 리더십과 그를 따르는 팔로어십의 결합이었고 보수정당이 안정적이라는 인상을 갖게 만든 요인이다. 그런데 이런 강점은 지난 21대 총선에서도, 그리고 이번 22대 총선에서도 전혀 발휘되지 못했다.
먼저 리더십이 무너졌다. 당의 보스는 당대표지만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우리 당 대표는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라는 소리가 나오곤 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국민의힘 원톱’은 8명이나 등장했다. 이준석 대표, 권성동 당대표 권한대행,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당대표 권한대행,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김기현 대표, 윤재옥 당대표 권한대행,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순이다.
당대표가 있다곤 해도 당의 실권자는 용산에 따로 있기에 실제로는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윤 대통령의 강한 통제력, 그리고 대통령과 가까운 친윤 그룹이 당의 방향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중론이었다. 예를 들어 전당대회는 중앙당 당직자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임하는 행사다. “OOO를 밀어야 돼”와 같은 권유가 암암리에 있고 자신과 연이 있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당선을 위해 당직자들도 꽤나 힘을 쏟는다. 정치인들과 같은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는 조직에서 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줄서기라는 비판도 있지만 정당만이 갖는 정치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는 전당대회 자체가 ‘낙점 행사’처럼 변질되면서 조직의 역동적인 면모도 잠잠해졌다.
당직자들의 불만도 나온다. 당의 리더십 부재에 대한 문제, 사무처 당직자들을 향한 권위적인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당 조직국에서 ‘서울 49개 지역구 중 6개에서만 우세를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을 때 당 지도부 중 일부는 “이런 게 오픈되게 만들어 괜한 짓을 했다”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앞선 전직 당직자는 “당시 이런 반응들이 사무처 당직자들의 활동을 위축되게 했다고 한다. 자체 검열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럴 때 조직은 보통 복지부동이 된다.
이미 총선 전부터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당직자 등 내부 자원을 국회의원 후보군에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직자 출신의 비례 명단 당선권 등재는 리더십이 팔로어십에 보여주는 존중이고 불문율처럼 지켜왔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그 처우가 달랐다.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명단이 나오자 권성동 의원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당 사무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순번) 배치는 어떻게 돼 있는지, 그걸 보면 답이 나온다”고 썼다. 비례대표 당선권에 당직자 출신이 없어서 나온 얘기였다.
“보수의 분화 잡아내는 게 너무 느리다”
이처럼 삐걱대는 당내 조직은 당 밖의 위기와 맞물려 돌아간다. 국민의힘의 문제는 근원적인 변화에 느리게 대응해왔다는 점이다. 그동안 보수정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이념’이라는 의제가 과거처럼 큰 효과를 발휘하기 힘든 정치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다. 탄핵 이후 보수정치는 더 거칠어지고 배타적으로 변한 전통보수, 이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중도보수 세력이 혼재하고 있지만 당최 여당에서는 중도보수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
한 당직자는 “탄핵 전후로 보수정당을 대중이 대하는 태도도, 우리를 지지하는 세력도 변화가 있는데 지도부가 이를 잡아내는 게 너무 느리다”고 말했다. “탄핵 이후 보수는 수명이 다한 것처럼 보였고 선거도 연전연패하면서 이대로 야당 붙박이가 되는 것 아닌가를 걱정할 정도로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황교안 체제 때는 당직자들이 국회를 점거하는 데 동원돼야 했고 이 때문에 회사를 관둔 이도 있었다. 보수가 전환할 수 있었던 건 김종인 비대위가 들어서고 중도보수의 길이 제시된 뒤부터다. 당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오세훈과 박형준이라는 중도보수 성향의 후보가 이겼고 그게 대선과 이후 지방선거까지 이어진 건데, 이런 성공의 길을 금방 까먹어버린다.”
어찌 보면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은 중도보수 이미지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단 둘러싼 기반이 취약한 탓에 이를 구현해내지 못했다. 앞선 당직자의 이야기다. “이번 선대위 지도부가 경험이 적은 초보들이다. 김무성 대표처럼 사무실에서 쪽잠 자면서 지휘할 만한 사람이 없다. 수도권 중진 의원들이 선대위원장을 맡았는데 그분들은 박빙이거나 열세 지역에서 뛰느라 바빴다. 상대적으로 상황실을 맡은 영남 의원들은 여유가 있지 않나. 종북 현수막을 달 뻔한 것도, 한 전 위원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방문했던 것도 그런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캠페인이다.”
경험 적은 선대위가 구성되면서 실무진들이 아래로부터 올리는 경고 신호들은 가볍게 취급됐다. 한 전 위원장을 두고는 초보 대표의 고군분투라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원톱 운동을 고집이라고 해석하는 기류도 강하다. 여의도 사투리, 여의도의 정치 폐해를 끝내겠다며 들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과도한 불신으로 해석됐고 보수정당의 윗단과 아랫단이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과거의 일사불란(一絲不亂)함도 회복하지 못했다.
고민되는 ‘전통보수’와의 거리감
지난 21대 총선이 끝나고 만들어진 총선 백서 때 출마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당 내부 문제는 ‘중앙당 차원의 효과적인 전략이 부재했다’였는데 이번에도 그런 문제는 수정되지 못했다. 한 전 위원장의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론’이나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은 전략적 실패였다. 뉴스토마토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지난 4월 13일부터 14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여당의 총선 패배 책임이 누구에게 조금이라도 더 크게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8.0%는 윤석열 대통령을 지목했다. 이번에 당선된 영남의 한 초선 의원은 “결과적으로 보면 국민은 대통령의 정치가 문제라고 했고 우리는 야당의 정치를 향해 ‘너희가 문제’라고 했다. 진단 자체가 오진이었고 해법도 빈곤했다. 역효과만 크게 났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22대 총선에서 참패한 국민의힘은 새로운 지도부 선출을 위해 또 한 번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단, 비대위의 성격을 쇄신형이 아닌 관리형으로 규정했다. 빠른 시간 내 전당대회를 치러 새 지도부를 출범시키겠다는 이야기인데, 기존 전당대회의 틀에서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는 당심 100%로 뽑는 당대표 선출 규정이다. 당의 환골탈태 정도를 진단할 수 있는 척도다. 만약 전당대회 속도전에 몰두할 경우 ‘민심’ 대신 또다시 ‘당심’만으로 대표를 뽑게 될 수도 있다. 당헌·당규를 바꾸기 위해서는 의견을 수렴하고 상임전국위와 전국위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
딜레마는 여기서 생긴다. 국민의힘 위기의 중심에는 윤 대통령이 있다. 문제는 수도권 민심과 거리가 먼 국민의힘의 전통보수는 윤석열 대통령을 지키고 따르자고 한다. 이렇게 될수록 이들과 차별화를 꾀하는 중도보수는 설 자리가 좁아진다. ‘당심 100%’ 전당대회에서 중요한 건 전통보수와의 밀착이다. 대통령과 차별화를 꾀해야 할 여당이 막상 서로 멀어지지 못하는 일이 또 생길지 모를 일이다. 총선 패배 이후 민심을 받들어 거듭나겠다던 약속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걷게 되는 것도 당연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