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충남 천안시 목천읍의 천안미곡종합처리장 공공비축벼 보관창고에 쌀포대가 가득 쌓여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4·10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이 민주유공자법 제정안과 가맹사업법 개정안 등 여당이 반대하는 법안을 줄줄이 국회 본회의에 넘기기로 의결하면서 또다시 입법 폭주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법안은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이 첫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고 국회 재표결 결과 부결된 ‘양곡관리법’이다.

양곡관리법은 쉽게 말해 쌀값이 폭락하면 정부가 초과량을 의무적으로 사들여 쌀값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강제한 법안이다. 당시 윤 대통령은 첫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국민의 막대한 혈세(血稅)를 들여서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거부권 행사가 불가피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민주당은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22대 국회가 개원하기도 전에 앞서 폐기된 ‘양곡관리법’과 거의 대동소이한 법안을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올렸다. 이 과정에서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로 회부된 법안이 60일이 지나면 소관 상임위 위원 5분의3 이상 찬성으로 본회의에 직회부할 수 있다”는 국회법 제86조 규정도 십분활용했다.

결국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19명 가운데 민주당 의원 11명과 무소속 윤미향 의원 등 총 12명의 찬성으로 지난 4월 18일 양곡관리법을 비롯해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 △한우산업 지원법 △농어업회의소법 등 이른바 ‘농업 민생 4법’이 본회의에 넘겨진 상태다. 지난 총선을 통해 3선 고지에 오른 국회 농해수위원장 소병훈 민주당 의원(경기 광주갑)은 “얼마 남지 않은 21대 국회 안에 ‘농업 민생 4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본회의 통과를 공언한 상태다.

민주 아성 전남, 국내 최대 쌀곡창

하지만 가뜩이나 남아도는 쌀의 과잉생산을 유도할 염려가 커 지난 문재인 정부 때도 포기했던 ‘양곡관리법’을 재강행하려는 민주당의 행태에 최대 지지기반인 호남 지역 표심만을 의식한 ‘입법폭주’란 비난이 나온다. ‘양곡관리법’이 통과되면 직접 수혜가 예상되는 논벼 재배 농가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은 민주당의 아성(牙城)인 전남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99만 농가 가운데 논벼 재배농가는 38만4000가구에 달한다. 이 중 전남의 논벼 재배농가는 6만8000여 가구로, 전체 논벼 재배농가의 17.6%를 차지한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논벼 재배면적이 가장 넓은 곳도 전남으로, 총 14만9896㏊ 땅에서 벼를 재배한다. 그 뒤를 충남(13만1643㏊)과 전북(10만7383㏊)이 따른다. 이번 총선에서 논벼 재배 면적이 가장 넓은 전남과 전북에서 민주당은 각각 10개씩 모두 20개 의석을 휩쓸었고, 논벼 재배면적 전국 2위인 충남에서도 11개 의석 중 8개를 차지했다.

이 같은 표심을 등에 업고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재선 나주시장을 거쳐 전남 나주·화순에서 3선에 성공한 민주당 신정훈 의원은 이른바 ‘농업 민생 4법’을 본회의에 직회부한 지난 4월 18일 “제2의 양곡관리법으로 쌀값 정상화를 실현하고, 농산물 가격안정제법을 통해 안정적인 수급관리와 생산기반 확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신정훈 의원은 국회 농해수위원으로 과거 ‘양곡관리법’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정작 민주당의 ‘입법 폭주’를 저지해야 할 여당인 국민의힘은 총선 참패의 충격 탓에 지리멸렬하다. 이미 수적으로 열세인 농해수위에서도 국민의힘 소속 의원 7명 중 여당 간사인 이달곤 의원을 비롯한 홍문표·최춘식 의원은 총선에 불출마했고, 안병길 의원은 컷오프되는 등 생존률이 50%가 채 안 된다. 민주당 농해수위 위원 11명 가운데 2명(김승남, 윤재갑)을 제외한 전원이 22대 국회로 재복귀한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그나마 지난해 민주당이 ‘양곡관리법’을 통과시키고, 윤 대통령이 ‘1호 거부권’을 행사했을 때는 여당의 도시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양곡관리법을 ‘포퓰리즘 법안’으로 매섭게 성토하는 목소리라도 나왔었다.

“쌀은 관리해줘야 하고 달걀은 관리해주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서울 송파갑 김웅 의원), “수요와 공급, 그리고 가격이라는 경제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는 포퓰리즘 정책”(서울 강남병 유경준 의원), “나라 살림을 거덜내고 미래세대를 빚더미에 짖눌리게 할 뿐”(서울 강남갑 태영호 의원), “고등어가 많이 잡혀 고등어값이 떨어져서 어민 수입이 줄어들면 정부가 의무수매해야 되느냐”(부산 남구갑 박수영 의원)는 등의 주장이었다. 여당 의원들의 반격에 시중에서도 “양곡관리법 찬성 의원들은 쌀로 세비(歲費)를 지급하라” “감자관리법과 고구마관리법은 없느냐”와 같은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4월 18일 양곡관리법 등 이른바 ‘농업 민생 4법’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뒤 기자회견을 연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무소속 윤미향 의원(왼쪽 둘째). photo 뉴시스

조국, ‘양곡관리법 수용’ 압박

하지만 총선 참패로 주눅이 든 국민의힘은 지난해와 달리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재강행에 대해 별다른 입장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지난해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강행 때 목소리를 냈던 수도권 여당 의원들도 불출마(김웅)했거나 대거 낙선(태영호, 유경준)한 상태다.

여당의 총선 참패로 윤 대통령의 힘까지 빠지면서,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도 ‘윤석열 대통령이 실천해야 하는 최소 열가지 사항’이라며 윤 대통령의 ‘양곡관리법 수용’을 압박할 정도다. 이번 총선에서 원내 제3당 지위를 차지한 조국혁신당은 광주를 비롯한 전남과 전북에서 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보다 높은 득표를 기록했다.

호남 지역 농민 표심을 의식한 민주당이 양곡관리법을 재강행할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절대다수 도시민들에게는 높은 식탁물가를 강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농가인구는 208만여명으로 주민등록인구(5132만명)의 4% 수준에 불과하다. 한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경사회 정서가 워낙 뿌리 깊은 터라, 한몸 드러누울 땅 한 평조차 없는 도시 서민들도 비싼 식탁물가를 감내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국제 시세 대비 2~3배 이상 높게 유지되는 쌀값이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 컨설팅업체 머서(Mercer)의 2023년 도시생활비 조사에 따르면, 서울은 전 세계 227개 도시 중 생계비가 16번째로 비싼 도시로, 영국 런던(17위)이나 일본 도쿄(19위)에 비해서도 높다.

양곡관리법이 통과돼 농민들이 벼농사에 안주하고 과수농가 등으로 전환이 줄어들면 사과와 배 등 과일값 고공행진이 계속될 것이란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으로 사과값은 전년 동월 대비 88.2%, 배값은 87.8% 폭등한 상태다. 각각 44년, 49년 만의 최대 상승폭이다. 양곡관리법으로 직접 수혜가 예상되는 전남은 나주평야를 낀 국내 최대 쌀 주산지지만, 배의 국내 최대 주산지기도 하다. 쌀 소비 감소에 맞춰서 벼의 재배면적을 줄이는 대신, 과일 등 대체작물 재배를 유도해야 하는 현실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주식인 쌀 소비량은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4㎏으로, 10년 전인 2013년의 67.2㎏에 비해 10.8㎏이 감소했다. 쌀 소비가 정점을 찍은 1970년 1인당 연간 136.4㎏의 쌀을 먹어치웠던 것에 비해 40% 수준이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84년(130.1㎏) 이후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줄곧 내리막길에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쌀 수급은 평년 수준의 작황을 기준으로 매년 약 20만t 정도가 남아도는 구조적 공급과잉 상황”이란 것이 정부 측 입장이다.

한국쌀, 중국 동북미의 3배 가격

쌀 수요가 줄고 공급이 넘치면 쌀값이 하락하는 것이 시장경제 원리에 부합한다. 반면 국내 쌀값은 인위적인 쌀값 지지정책으로 수요가 줄고 쌀이 곳간에 넘치는 와중에도 국제시세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과거 정부에서부터 농가보호 등을 위해 인위적으로 높은 쌀값을 유지해 오면서다. 지금도 수입쌀에는 최대 513%에 달하는 초고율 관세가 적용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2024년 기준으로 국내 쌀 20㎏당 평균 중도매가는 4만9694원(상품 기준)에 형성돼 있다. 반면 국내 쌀과 맛과 성질이 유사한 중국 동북(東北)미의 2024년 3월 기준 톤(1000㎏)당 도매가는 3879위안이다. 이를 20㎏ 단위로 환산하면 도매가가 77.58위안(약 1만4762원)으로 국내 쌀값의 3분의1도 안된다.

중국 헤이룽장성 일대에서 재배되는 중국 동북미와 국내 쌀은 단립종으로 밥맛의 차이가 거의 없다. 특히 헤이룽장성 우창(五常)에서 생산되는 우창쌀은 시진핑 주석의 밥상에 오르는 쌀로 밥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정작 국내 소비자들은 매일 한 공기 밥을 먹기 위해 중국 소비자에 비해 3배 이상 비싼 쌀값을 지불하는 셈. 이에 최근에는 중국에서 오는 여행객들이 압축포장한 쌀을 개인용도로 들여와 재판매하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다. 인천공항 여행자통관과의 한 관계자는 “개인용도로 5㎏까지 쌀을 들여오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국내 쌀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쌀 수출국인 미국이나 태국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 캘리포니아산 중립종과 태국산 장립종의 가격은 2024년 3월 기준으로 톤당 각각 957달러와 619달러에 형성돼 있다. 이를 20㎏ 단위로 환산하면 미국산은 19.14달러(약 2만6422원), 태국산은 12.38달러(약 1만7090원)에 불과하다. 국내 유통되는 쌀과는 맛과 성질에서 차이가 있지만, 국내 쌀값에 비해 월등히 낮은 가격이다. 김용환 전 팜한농 대표는 “우리가 주로 먹는 자포니카(단립종)는 인디카(장립종)에 비해 물동량이 거의 없어 흉년이라도 들면 자포니카는 가격변동에 극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3월 기준 전년 동월 대비 88.2% 폭등한 사과. photo 뉴시스

사과·배 재배농가는 오히려 줄어

정치적·문화적 이유로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되는 쌀값 탓에 쌀 수요 감소에 맞춰 줄어야 할 논벼 재배농가가 전체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늘었다. 벼 재배면적 감축정책에 따라 벼 재배농가 자체는 2022년 39만1000가구에 비해 38만4000가구로 줄었지만, 전체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38.2%에서 2023년 38.4%로 되레 늘어난 것.

전문가들은 이 같은 이유를 벼 농사 자체가 과수농사 등에 비해 수월하다는 데서 찾는다. 농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내 논벼 재배는 새마을운동을 한 박정희 정부 때부터 기계투입을 위한 경지정리 등에 전력한 덕분에 모를 심는 것부터 시작해 농약을 치고 수확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100% 기계화를 달성한 상태다. 기계의 힘을 빌리는 터라 농가 인구에서 차지하는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이 지난해 처음으로 50%를 돌파해 52.6%에 달했지만, 쌀 생산과 수확에는 큰 영향이 없다.

반면 사과와 배 등 과일을 공급해야 할 과수재배 농가는 전체 숫자는 물론 전체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동시에 줄고 있다. 통계청 농림어업조사에 따르면, 과수 재배농가는 2022년 16만7000가구에서 2023년 16만6000가구로 1000가구가 줄었다. 과수농가가 전체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6.7%에서 16.6%로 감소했다.

특히 사과와 배는 재배농가가 전년 대비 각각 6.1%와 5.7%씩 줄었는데, 이는 올초 사과와 배 가격 폭등에도 한몫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농업 관계자는 “국내 과수농가는 미국 등 농업선진국과 달리 기계화가 아직 덜 된 까닭에 비탈 등 경사지에 있는 경우가 많고 수확 때 사람 손을 많이 필요로 한다”며 “기계 투입이 제약돼 인건비가 많이 드는 등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3월 기준 전년 동월 대비 87.8% 폭등한 배. photo 뉴시스

“쌀에 대한 국민적 합의 필요”

반면 민주당은 호남 표심을 의식해 ‘양곡관리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사과관리법’ ‘배관리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벼 농사를 주로 하는 농가가 민주당 지지기반에 많이 분포한 반면, 국내 과수농가는 국민의힘의 아성인 경북에 주로 포진하고 있어서다.

경북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위한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에 이은 쌀 시장 개방 결정 직후 대거 논농사에서 밭농사와 과수농사 등으로 전환했다. 국내 최대 포도산지인 경북 김천 역시 논농사에서 과수농사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경우다.

실제로 전국에서 과수농가가 가장 많은 곳도 사과 농가가 많은 경북으로 전체 농가의 30%가 경북에 몰려 있다. 그 뒤를 차지하는 것은 감 농가가 많은 경남(13.5%)이다. 반면 논벼 재배농가가 압도적인 전남과 충남의 과수재배 농가 비중은 각각 10.4%와 4.1%에 그친다. 반면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13석이 걸린 경북에서는 한 석도 건지지 못했고, 16석이 걸린 경남에서도 3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한편 양곡관리법 재강행에 따른 각 정당의 표득실과 별개로, 양곡관리법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 가뜩이나 처치곤란한 쌀 매입이 의무화돼 정부로서도 상당한 재정적 부담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정부의 공공비축미 가운데 올해 기준으로 보관한 지 이미 3년이 지나 사료용으로 처분하는 쌀만 40만t에 달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에 따르면, 쌀 매입 의무화로 인해 초과생산량이 계속 증가하면 남아도는 쌀이 오는 2030년에는 63만t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되면 남아도는 쌀을 매입하는 데만 약 1조4000억원 수준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1조4000억원은 2024년 기준 농촌진흥청의 한 해 전체 예산(1조974억원)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다.

김용환 전 팜한농 대표는 “쌀은 좋은 품질을 위해서 수분 함량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데, 오래 놔두면 곰팡이가 피고 색깔이 변하고 쥐가 파먹는 등 의외로 보관비용이 많이 든다”며 “국내 농업경쟁력을 높이려면 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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