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고립과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아랑곳없이 북한 정권이 철권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이 조선 주자학(朱子學, 신유학, Neo-Confucianism)에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인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미국 시카고대학 역사학과의 명예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다. 1980년대 그는 한국전쟁 관련 수정주의 이론으로 반미자주파 운동권의 정신적 스승으로 군림했고, 그 덕분에 2007년 “후광 김대중 학술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커밍스는 과연 어떤 논리로 북한 정권의 존속을 설명할까? 아래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이하 북한)은 일면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했기에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북한은 수백 년에 걸쳐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오래된 신유학 이데올로기를 상기시키는 정치적 전통을 복원했다. 신유학이라는 아시아의 전통적 학파는 국가가 가족을 본떠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민의 아버지로서 복무하는 통치자의 주요 기능은 인격적 통치와 도덕적 모범으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것인데, 이는 마르크스를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Bruce Cumings, “Getting North Korea Wrong,”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2015, Vol. 71(4) 64–76).
마르크스가 거꾸로 세운 헤겔을 김일성이 바로 세웠다?
구소련이나 동구 공산권의 교과서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워서 유물론적 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을 제창했다. 헤겔은 인간의 사유가 지속적 자기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더 높은 단계로 고양해 갔다고 설명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서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이 역사 발전의 변증법적 과정을 이끌었다는 유물변증법을 제창했다는 마르크스 추종자들의 판에 박힌 선전이다.
2012년 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브루스 커밍스는 <<르몽드(Le Monte)>>지 기고문에서 “북한이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마르크스를 다시 물구나무 세웠다”고 썼다. 그리고는 “대원군(大院君)의 신유학 기록관들(Neo-Confucian scribes)이 좋아했을 도식”이라는 묘한 사족(蛇足)을 달았다. 커밍스는 김씨 왕조의 주체사상을 평하면서 왜 또 그렇게 “뱀의 발”을 그렸을까?
바로 그가 수십 년간 줄기차게 북한의 주체사상은 조선 주자학의 연장이라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조선 주자학에 관해선 한 편의 논문도 쓴 적이 없다. 또한 그는 주체사상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직관적으로 북한이라는 “세계 4대의 병력을 자랑하는 병영국가(garrison state)”가 조선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거칠게 펼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이 조선의 연장이므로 북한에 모종의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인지, 아니면 북한은 조선이 배태한 괴물이므로 조선이 북한처럼 생지옥 같은 나라였다는 주장인지 애매하다. 그 점에 대해서 커밍스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산주의라는 병 속에 담긴 신유학이나 마오쩌둥의 자켓을 입은 주희(Neo-Confucianism in a communist bottle, or Chu Hsi in a Mao jacket)”에 비유한다. 문학적 수사로 치장하지만, 그의 주장 속에 담긴 의도는 뻔히 들여다보인다. 바로 조선 주자학을 끌어와서 북한식 전체주의 병영국가 체제를 옹호하려는 목적이다.
신종 “오리엔탈리즘”인가? 악마의 변호인인가?
커밍스의 수제자로서 미국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한국학 연구자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은 한술 더 떠서 북한 정권이 고립 상태에서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가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북한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사회경제적 혁명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암스트롱 역시 “김씨 조선의 아버지 수령” 김일성이 제창한 주체사상과 “이씨 조선”의 창건 군주 이성계(李成桂)가 채택한 주자학이 매우 유사하다고 강변한다.
“북한의 공산주의 수용은 일면 조선조 초기 유교화 과정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와 개국공신처럼 김일성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사회의 전면적 변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의 선대들과는 달리 그들은 사회 밑바닥 기층민의 요구와 생각도 주의 깊고 민감하게 포용하려 했다.” (Charles Armstrong,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암스트롱은 이성계와 김일성이 각각 주자학과 공산주의라는 외래 사상을 받아들여 정치 제도, 사회 구조, 경제 활동, 문화 및 일상생활 면에서 근본적 개혁을 추구했는데, 조선과 달리 북한은 기층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더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사회혁명을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구한말까지 주자학에 집착했던 조선조와 오늘날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는 북한은 모두 종주국보다 더 강력하게 이념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한국 엘리트의 정신사적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북한혁명(1945-50)”의 “자생적 측면(indigenous aspects)”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 정권은 냉전기 구소련의 영향 아래 급조된 “괴뢰정권”이 아니라 만주 게릴라 부대의 항일 무장투쟁에 뿌리내린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북한의 소비에트화가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한국화(Koreanization)”다.
암스트롱은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소련파, 연안파 등 북한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숙청한 것 역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한국화 과정”이라 말한다. 그렇게 외세 지향적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함으로써 북한은 주체적인 민족주의 공산당 정권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이 만주 게릴라식 병영국가를 만들고 민족 중심의 주체사상을 제창하여 소련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공산주의의 한국화”를 이뤘고, 그 결과 북한 인민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조선 노비제에서 북한의 노예제로
조선 주자학과 김일성 주체사상을 연결하려는 커밍스와 암스트롱의 시도는 학술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 지난 70여 년 북한 정권은 수령 유일주의, 전일적 일인 지배, 극도의 인격 숭배, 완벽한 언론통제, 전면적 대민 지배, 완전한 상호감시, 집단연좌제, 굴라크 병영정권 등등의 전체주의적 특징을 과시해왔다.
그런 식의 완벽한 통제체제의 이념적 기원을 구태여 인류 사상사에서 찾자면, 신유학보다는 선진(先秦) 시대 법가(法家)에 가깝다. 법가는 전국시대 백가쟁명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단일한 이념 아래 온 백성을 전면적 국가통제에 복속시킨 통일의 이념이었다. 물론 법가는 통치의 합리성과 마키아벨리적 현실감각을 접목한 그 당시의 진보적 세계관이었다. 법가 이념을 김일성 주체사상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법가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그럼에도 구태여 북한식 전체주의를 전통 시대의 사상과 연결하려면, “부드러운” 유가적 통치보단 완전 통제의 법가의 통치술이 그나마 차라리 더 가깝다는 얘기다. 분서갱유의 사상통제, 연좌제 방식의 강압 통치, 반대 여론의 탄압, 사상적 획일화, 대항엘리트의 완벽한 제거, 일인 지배의 확립 등등 법가 통치는 바로 20세기 전체주의 통제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스탈린식 전체주의에 히틀러식 순혈주의와 쇼비니즘을 결합한 무자비한 전체주의 통제국가에 불과하다. 그러한 북한 정권의 폭압 통치를 조선 주자학의 발현이라 한사코 우겨대는 커밍스와 암스트롱의 숨겨진 의도(hidden agenda)는 무엇일까? 베트남 전쟁 이래 미국 학계에 뿌리내린 미국 좌파 지식인들이 북한의 사례를 끌어와서 미국 대외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뻔히 읽힌다. 문제는 그들이 걷잡을 수 없이 왼쪽으로 치달아 급기야 북한 정권의 편에서 북한 정권을 위해 북한 정권의 폭압 통치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학술적 코미디를 연출했다는 사실이다.
커밍스와 암스트롱은 조선 주자학과 김일성 주체사상의 유사점을 강조하지만, 두 사람 모두 터부시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조선 왕조의 광범위한 노비제(奴婢制)가 김씨 왕조에서는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 북한이 인구 10% 이상을 노예 삼은 세계 최악의 국가 노예제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왜 조선 노비제에 대해선 침묵하는가? 그들은 왜 실질적으로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북한의 다수 대중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할까? 단순하게도 그 이유는 커밍스와 암스트롱이 북한의 옹호를 위해 조선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들과는 달리 미국의 대표적인 조선사 연구자 중에는 조선을 노예 사회라 평가한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1934-2006)나 조선 노비제가 북한으로 연결됐음을 강조하는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1946- ) 같은 학인들도 있다.
커밍스나 암스트롱이 조선 노비제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을 듯하다. 커밍스는 그의 저서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전문가들이 지난 반세계 줄곧 강조해 온 “조선=노예 사회(slave society)”라는 테제를 슬금슬금 소개한다. 다만 그는 조선의 노비제가 북한식 국가 노예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 북한의 전체주의적 대민 통제가 조선 노비제의 연장이라 주장하면, 그들이 극구 꺼리는 북한의 악마화 논리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북한이 “악의 축”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그들은 주체사상이라는 전체주의 이념을 조선 주자학의 연장으로 미화한다.
조선 왕조를 동방 최고의 문명국이라 미화하고 조선 주자학을 훌륭한 이념으로 치장해 온 대한민국 국사학계의 기본 입장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러한 커밍스-암스트롱의 테제에 부합한다. 돌려 말하면, 조선 노비제 연구를 회피해 온 국사학계와 커밍스-암스트롱의 북한 미화가 조화롭게 공명한다. 커밍스와 암스트롱이 조선조를 미화하는 국사학계에 올라타고서 조선 주자학이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펼쳐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모든 거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조선 주자학과 북한 주체사상의 연속성을 강조하면 북한 정권의 옹호론이 되고 말지만, 조선 노비제가 북한의 국가 노예제로 이어졌음을 강조하면 북한 정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무기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한평생 미국학계에서 북한을 변호해 온 커밍스는 여전히 한국 좌파 지식계에서 우상처럼 군림하고 있다. 한편 암스트롱은 2020년 논문 표절 혐의로 컬럼비아 대학 윤리위원회에 제소되어 불명예스럽게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미주 한국학의 씁쓸한 단면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