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9일 평양에 간 푸틴이 김정은과 함께 탄 러시아제 고급 리무진 아우루스(Aurus)를 직접 몰고 있다. 이 리무진은 푸틴이 김정은에 내린 하사품이었다. 북한에 사치품의 공급, 판매 등을 금지하는 2017년 유엔안보리 결의안 2397조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읽힌다./조선중앙통신

지난 6월 19일 러시아의 전제군주(autocrat) 푸틴은 북한의 전제군주 김정은과 손을 잡고서 전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 “쌍방 중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면 타방은···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제4항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74년 전 대한민국을 절멸 위기로 몰아넣었던 기습 공격의 주체가 이제는 타국에 의한 “무력 침공”을 우려하는 부조리다.

자동 군사개입이란 구절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28년 만에 북·러의 관계가 동맹 수준으로 고양됐다고 볼 여지는 있다. 현재 북한은 실제로 러시아에 대규모의 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말 푸틴은 북한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부응하여 북한은 벌써 11,000개의 선적 컨테이너에 재래식 무기를 실어서 러시아에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숨어서 북한의 미사일로 우크라이나에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와 북한이 “반미”의 구호 아래 군사적 연대까지 굳혀가는 셈이다. 이번에 체결된 북·러 조약이 실질적 군사동맹이냐 여부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분분하다. 다만 북한이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돕고 있는 현 상황은 이미 실질적으로 양국이 군사동맹 상태임을 드러낸다. 북·러가 다시 냉전 시대의 동맹 관계를 복원하려는 지금, 대한민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을 찾기 전에 우선 냉전의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자.

안 끝나는 한국전쟁

6.25가 다시 또 코앞이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었나? 전쟁 발발 직후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스탈린의 전략에 따라 김일성이 소련제 무기를 지원받아 일으킨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 진영의 계획적 침략 전쟁임을 대번에 간파했다. 그러한 전통주의적(traditional) 해석에 대항하여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 등은 한국전쟁은 한반도 내부의 혁명적 민족 해방운동과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수정주의적(revisionist) 해석을 내놓았다.

커밍스류의 수정주의가 1980년대 한국의 좌파 지식계에 널러 퍼졌다. 특히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으로 가면서 남로당 활극과 빨치산 운동을 “반미구국” 투쟁으로 미화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 통일의 영웅적 결단이라 칭송하는 학술서적과 문예 작품이 대중적 선풍을 일으켰다. 수정주의에 따르면, 분단의 책임은 이승만 정권에 있으며, 전쟁의 발발은 미국의 음모이고, 민족사의 정통은 북한 정권에 있었다. 당시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김일성 주체사상에 따라 민족해방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주사파가 장악했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의 극비 문서가 공개되면서 철옹성 같던 수정주의는 만신창이로 무너져내렸다. 6.25 전쟁은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낸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받고서 소련제 중화기를 앞세워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한 냉전 초기의 이념전쟁임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815 해방 5주년을 기념하는 1950년 8월 15일 북한의 해방일보. 북한 인민군 점령 상태에서 서울시는 “김일성 장군”과 “스딸린 대원수” 앞으로 “멧-세지”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공공부분

6.25 전쟁 발발 이후 74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대남 침략 전쟁의 음모를 짜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도발했던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의 후예들은 지금도 강력한 독재 정권을 유지하며 자유적 국제 질서에 맞서 신냉전의 활극을 펼치고 있다. 70여 년 전에 비해 그들의 권력은 말할 수 없이 더 강화되었다.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해 에너지 강국이 된 러시아, 공산당 일당 독재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수령 유일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면서도 결국 40~50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된 북한·····. 6.25 전쟁을 일으켰던 그 세 주체가 지금 또다시 묘하게 얽히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고 있다.

1950년 스탈린의 국제전략

북한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중국이 경계의 눈초리로 마주 서 있는 작금의 상황은 다시금 1949~1950년의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1949년 12월 말까지 김일성은 최소 48차례나 대남 침략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스탈린은 북한의 전력 미비와 국제정치 등의 이유로 김의 대남 도발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 점에선 중국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을 만난 마오쩌둥은 전후 복구를 위해선 3~5년 정도 필요하다면서 김일성의 대남 침략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일성의 요청을 그렇게 48번 이상 물리쳤던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갑작스럽게 김일성의 대남 침략을 재가했고, 중국에는 그 사실을 숨긴 채로 2월부터 북한에 중화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46년 8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과 조선신민당의 연합대회. 당시 북한에선 거의 모든 정치 집회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내걸렸다./공공부문

스탈린은 왜 갑자기 변심하여 김일성의 대남 침략을 허락했는가? 우선 그는 미군 병력을 아시아에 묶어둠으로써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더욱 키우려 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중국에 대한 유화책을 펼쳐서 중·소 관계를 분열시키는 나름의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공산혁명의 주체였지만, 천하를 제패한 실질적 황제였던 마오쩌둥의 에고가 이념보다 강했다. 국민당을 물리친 중국공산당이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에 나서는 상황을 스탈린은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미·중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갈 방도를 모색했고, 김일성의 남침이라는 묘수를 찾아냈다.

전쟁 발발 후 만에 하나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여 극동의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중국이 참전한다면 소련은 배후에 머물면서 미·중 관계의 파탄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영미의 대중 포용 정책을 차단하고 중국을 소련의 영향 아래 묶어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게다가 1949년 소련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에 미·소 전쟁의 가능성은 없는 상황이었다. 스탈린으로선 김일성이 남침하여 이기나 지나 하나도 잃을 것 없는 꽃놀이패를 쥔 셈이었다. (Kim Donggil, Stalin’s Korean U-Turn: The USSR’s Evolving Security Strategy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24, no. 1(June 2011): 89-114)

당시 스탈린은 일흔한 살이었고, 김일성은 고작 서른여덟 살이었다. 김일성은 1930년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여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서 소규모의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지만, 1941년 관동군의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친 후엔 소련군에 들어갔다. 김일성이 소련군에 속해 있던 그 4~5년의 세월 동안 소련-일본 중립 조약에 따라 소련군은 단 한 번도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런 김일성을 북한의 수령으로 발탁하여 막강한 권력을 쥐여준 은인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 점에서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이 아니라 스탈린의 괴뢰이며 소련의 앞잡이였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은 올해 마흔 살이다. 이번에 평양에 가서 김정은을 끌어안은 푸틴은 일흔한 살이다. 70대의 스탈린이 33세 연하의 김일성을 갖고 놀았듯, 70대의 푸틴은 31세 연하의 김정은을 감싸고 돌고 있다. 1950년 스탈린은 “미제 타도!” “민족해방!”을 외치는 김일성을 움직여서 중국과 미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을 유도하는 꾀를 냈다. 74년이 지난 오늘 러시아의 전제군주 푸틴은 북한의 전제군주 김정은과 함께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게임을 펼치려 하고 있다.

스탈린이 그러했듯 푸틴은 노회하고, 김일성이 그러했듯 김정은은 무모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결탁은 6.25 전쟁을 낳았다. 푸틴과 김정은의 결탁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아니,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전략으로 시대착오적 전제군주의 군사전략에 대응해야 하는가? 최선의 해답을 찾으려면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의 삼각관계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김일성./공공부문.

북·러의 결탁에 뿔난 중국

북한과 달리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공개적 지지 선언이나 군사적 지원 대신 경제적 공조 규모를 확대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무역 규모는 2022년 1,900억 달러로 36%나 증가하고 2023년엔 다시 2,400억 달러로 26.3%나 증가했다. 중국이 만약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면, 중국을 향한 미국, 유럽 및 자유 진영 국가들의 반중 연대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북·러의 밀착을 보는 중국의 관영 매체는 애써 말을 아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인민일보는 6월 19일 북·러 정상회담 관련해선 딱 한 줄 기사만 실었다. 중국의 CCTV는 20초 짧은 보도를 내보냈다. 이유야 어렵잖게 설명된다.

한국전쟁 당시 3백만 명에 달하는 “지원병”을 파견하여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구호 아래 김일성 정권을 구제해준 은인은 중국이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도 핵무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북한 정권을 국제사회의 제재에 구멍을 뚫어 연명시켜 준 은인도 중국이었다. 북한이 중·러 사이를 오가며 중간자 게임을 벌이는 현실을 중국은 묵과할 수 없다. 시진핑의 입장에선 자신의 “리틀 브라더”인 김정은이 푸틴을 “빅 브라더”로 모시려 하니 심통이 날 수밖에 없다.

6.25 전쟁 당시 중국의 포스터.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승리 만세!”/공공부문

반면 김씨 왕조의 관점에선 북한이란 나라를 세워 준 은인은 스탈린의 소련이었고, 유엔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준 은인은 마오쩌둥의 중국이었다. 김정은으로선 중·러 양국에 양다리를 걸치고 두 나라를 공히 우방으로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반미의 구호 아래 뭉친 북·중·러가 실제로는 서로 다른 셈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 북·러·중의 복잡한 관계가 신냉전의 삼자 동맹(tripartite alliance)으로 강화될 수 있을지, 아니면 과거 냉전 시대 익히 보았듯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서 소련의 붕괴와 같은 더 큰 역사적 변화를 몰고 올지는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순 없다. 최근 더 긴밀해지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군사적 공조를 보면 일단 중·소 분열은 요원해 보인다. 러시아는 중국에 방위산업의 전문지식을 제공해왔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엄호하면서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형국이다. 국제관계엔 그러나 늘 예측불허의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전쟁을 공모했던 1950년의 북·중·소는 그보다 훨씬 공고한 반제 동맹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등장하면서 중·소 갈등은 이념전을 넘어 군사 충돌까지 비화됐다. 중·소 갈등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미국은 결국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고, 체제의 모순에 휩싸인 소련은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북·중·러가 신냉전의 반미 연대로 자유적 국제 질서에 대항하려는 작금의 현실은 지난 냉전 시대 미국의 “봉쇄 정책(containment)”과 “쐐기 전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 점에 관해선 다음 회에 이어가기로 한다. <계속>